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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낮꿈을 쫓는자(스포일러 有)

왕풍뎅이 2010. 4. 30. 21:18

꿈을 꾸는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밤에만 꿈을 꾸는 인간이며, 다른 하나는 낮에도 꿈을 꾸는 인간이다.
밤에만 꿈을 꾸는 인간은 위험하지 않으나, 낮에도 꿈을 꾸는 인간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낮에도 꿈을 꾸는 인간은 자신의 꿈속에 타인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모두 본 후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대학시절 책에서 읽었던

괴테가 남긴 낮꿈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 선조시대 때,

실존했던 대동계의 해산과 관련해 극적인 스토리를 삽입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선조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쫓겨난 대동계의 창립자인

정여립은 실재로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라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라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체제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설파하였던 사상가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은 이미 400년전에 봉건사상을 타파하려던

위대한 사상가이자,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공화주의자" 라고 극찬한바 있습니다.

 

어쨌든 영화는 이러한 대동계를 소재로 하여 제작 되었으나,

대동계가 품고 있던 사상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왜놈들을 무찌르는 것이 대동계의 목적이다!'

라는 정도의 설명이 전부일 뿐입니다.

 

어쨌든 영화는 대동계의 계주인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자결하여 그 목이 효수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담당한

맹인 검객 황정학입니다. 처음 이 영화에 맹인검객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일본 영화인 <맹인검객 자토이치>가 생각났습니다.

<맹인검객 자토이치>에 등장하는 맹인 자토이치 역시 상당히

느물느물한 성격인데,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한 자토이치의

경우 조금 차갑고 비정한 면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맹인검객 황정학의 경우 매우 인간적이며, 익살스럽고

정감 넘치는 인물입니다. 아마도 정여립이 꿈꾸던 대동계의

사상적인 이상은 바로 황정학과 같은 성격의 인간군상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만들어가는 세상일 것입니다.

 

 

 

 

이몽학은 왕족 출신(홈페이지에 가보니 왕족이라고 나오더군요)

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에 휩싸여 자신의

스승인 정여립을 죽이고 동지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자신의 야망에

반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단칼에 죽여버리는 비정함을 내보이는

인물입니다.

 

그 어떤 이상적인 사상도 항상 이몽학과 같은 인간의 손에 의해

실천되면 붉은 피냄새를 뿌리며 변질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꿈꾼 사회주의를 자신의 독재 도구로 사용한

구소련의 스탈린이 바로 그러한 인물의 대표적인 유형입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이런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이 이렇게 야망에 불타는 낮꿈 속에 빠져 사는 사람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꿈을 쫓는 남자인 이몽학을 사랑하는 이몽학의 여자 기생

백지입니다. 꿈을 쫓고 열정이 가득한 사람은 여성에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까요? 백지는 낮꿈을 꾸는 이몽학의

모습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좌를 노리는 야망만이 가득한 이몽학의 꿈 속에서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존재치 않습니다.

 

 

 

예조판서 한응인의 서자인 견자(犬子)입니다.

서자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에 비관한 나머지 매우 삐뚫어진

상태입니다. 지금 시대였다면 껌좀 씹고 있을 인물인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댕기머리에 수염을 기른 순박한 반항아의

모습을 한 인물입니다.

 

서자라는 신분의 굴레에 대한 비관으로 꿈을 잃어버린

불쌍한 인물입니다. 꿈이 없기 때문에 그의 반항심은 그저

치기어린 감정에 불과할 뿐이며, 그는 늘 가슴이 텅 빈 듯한

공허함을 느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견자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그저 텅 빈 가슴을

잠시나마 채워줄 수 있는 일시적인 목표에 불과합니다.

 

 

 

 

대동계의 계주인 정여립이 죽은 후,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대동계를 이용하려 드는 이몽학의 태도를 견제하기 위해

맹인검객 황정학은 그에게 경고를 합니다.

 

"양반은 권력뒤에 숨고, 광대는 탈뒤에 숨고, 칼잽이는 칼뒤에

숨는다고. 칼잽이가 칼 뒤에 숨어있어야지!"

 

 

 

 

한응인의 집에서 이몽학의 칼에 찔려 죽어고 있는 견자를

발견한 황정학은 그를 대리고가 살려냅니다.

조금 돌팔이 기운이 느껴지는 듯 하지만, 영화 내용만으로

본다면 황정학은 장님이지만 매우 뛰어난 의술을 지닌

명의입니다.

 

사람을 구하는 의술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검술을 익히고 있는 황정학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아마도 필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꿈이었을 것입니다.

 

본래 직업이 의사였지만, 아무리 자신이 의술을 사용하여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 하더라도 잘못 된 체제 속에서는

끝없는 희생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실감하여, 혁명가가

되었던 체 게바라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황정학은 의술과 혁명 두 가지 전부로 세상과 사람을

구하고 싶은 이상주의자였는지도 모릅니다.

 

 

 

 

황정학 덕분에 목숨을 구해 심부름꾼 노릇을 하게 된 견자는

뻑하면 황정학의 공격에 두들겨 맞습니다. 황정학의 인물

특징을 볼 때, 아마도 그는 견자가 또 다시 이몽학을 잡겠다고

나서다 칼침을 맞아 비명횡사를 당할까봐 그를 대리고 다니면서

약간의 검술을 가르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밤중에 검술 수련을 하는 견자입니다.

견자에게는 어두운 밤이지만, 장님인 황정학에게는 낮이나 밤이나

어두컴컴한 세상임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황정학이 바라보는 세상은 밝게 빛나는 달이 뜬 세상임에 반해,

견자를 비롯하여 이몽학과 선조, 대신들 등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둡고 칙칙한 세상입니다.

 

 

 

 

이몽학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동계에 의해 점거 당한 용인 관아에

온 황정학입니다. 대동계의 사람들은 모두 황정학을 알기에 그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황정학인 대동계의 사람들로부터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몽학의 경우에는 오리지 폭력과

살육이 만들어낸 공포심으로 대동계의 계원들을 다스립니다.

 

대동계의 계원들은 모두 이몽학의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이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미 그들은 모두 이몽학과 함께

한배를 탄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만류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만류하지 못하는 이몽학을 만류하기 위해 나선 인물이

바로 맹인 검객 황정학입니다.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난형난제의 무력을

보여주는 황정학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황정학이 누군가의 칼에 찔려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채 너무나도 태연하게 주변의 모든 것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황정학도 야수와도 같은

이몽학에게는 조금씩 밀립니다.

그러나 사실, 황정학은 이몽학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몽학아, 한양가지마라. 이건 모두가 죽는 꿈이여."

 

이몽학의 낮꿈은 그 혼자만이 아닌, 주변의 모든 이들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무서운 꿈임을 황정학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몽학을 사랑했지만,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 백지.

그러나 그녀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몽학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몽학의 낮꿈에는 백지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백지는 꿈을 꿉니다.

낮꿈이 아닌 밤꿈에서라도 이몽학과 함께 만나 사랑을

속삭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두의 파멸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이몽학은

결국 꿈을 이루지만 그 꿈은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름을 벗어난 달.

그것은 구름속에 가려져 실체를 알 수 없을 때에 인간의 상상력

덕분에 아름다운 이상처럼 느껴지는 꿈의 잔인한 실체입니다.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을 꿈꿨다면 이몽학의 삶은 그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백지를 비롯하여

그의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달은 구름 속에 가려져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달을 아름답게 꾸미니까요.

 

 

 

 

견자에겐 꿈이 없습니다.

그에겐 스스로에게 꿈이 없는 것이 뼈에 사무치는 한입니다.

꿈이 없는 것이 한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사랑하던 아버지와

백지가 모두 그의 꿈 없음을 탓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불평불만만 가득한 채 진취성이 전혀 없는

자신의 삶이 그 스스로도 답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대동계라는 집단은 이 견자라는 인물에게 가장 어울리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이몽학의 낮꿈에 휩쓸린 대동계는 이미 그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견자에게는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견자는 모순에 휩싸여 있습니다.

 

황정학이 견자에게 한 말을 보면 그의 상태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뒤 돌아봐. 니놈 발자국이 어지럽제? 그게 니놈 마음이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사실 조금 매끄럽지 못한 영화입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해 왜군이 도성을 향해 침략해 오고 있는데,

일단 한양부터 점령한 다음에 왜놈들을 막자는 대동계의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집착과, 견자의 이몽학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은

둘 다 꿈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으며, 관객에게 꿈이란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괴상한 결론을 내리게 만듭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구름'은 사람된 도리 내지는 인륜과

같은 도덕적인 질서이며, '달'은 낮꿈을 의미합니다.

낮꿈을 꾸는 것은 좋으나, 사람 된 도리는 지켜가며 꿈을 꿔야지

사람 된 도리에서 벗어난 꿈을 꾸면 결국 그 결말이 매우 허망하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 장면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완성도를

심하게 훼손하는 요소입니다. 견자가 달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마지막

장면을 도대체 이준익 감독이 왜 집어 넣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견자가 생전에 자신에게 꿈이 없음을 안타까워 했으니, 그 꿈에 대한

집착을 스스로 버린다는 의미를 넣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지막 엔딩은 감독 이외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쌩뚱맞습니다.

 

주변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꿈이 허망한

꿈이라면, 주변 스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마지막 엔딩 장면을 넣는

것을 거의 모든 스텝들이 반대 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준익

감독이 이 마지막 엔딩 장면을 고집스럽게 집어 넣은 것은 결국 이 영화

역시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 씬을 삭제한다면, 이 영화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아질 것입니다.

 

 

※ 인조와 함께 조선시대에서 가장 무능한 왕으로 손꼽히는 선조가

이 영화에서는 매우 비열하게 표현됩니다. 요즘, 역사 왜곡에 열을

올리고 있는 뉴라이트에서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해야 한다며

왜곡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인물이 바로 선조와 이승만 대통령인데,

이 영화는 용케 개봉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출처 : 희망대학교
글쓴이 : 시지프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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