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필자가 프랑스의 과학기술연구단지인 지중해 인근에 있는 <소피아안티폴리스>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라디오를 틀었다가 ‘한국에서 대단히 놀라운 오페라를 보았다’는 프랑스 기자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그는 한국의 오페라는 단 두 사람이 하는데 한 사람은 부채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다른 한 사람은 북을 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오페라가 있다는 것도 생소하지만 공연 시간이 8시간이나 되어 더욱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칭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채를 든 가수가 8시간이나 계속 노래를 부르는 데도 관객들 중 어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자신 또한 끝까지 한국의 오페라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에 독특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체험한 것은 우리의 판소리였다. 당시 필자는 한국의 판소리 공연이 한 외국인에게 이처럼 잊을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반가웠고, 또 판소리를 한국형 오페라라고 주저없이 설명하는 데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우리 판소리가 프랑스인뿐 아니라 온 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는 사실은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제2차 회의에서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데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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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좌측)와 서서(우측), 서서는 유비에게 자신보다 훨씬 재주가 많은 제갈량을 직접 찾아가서 모시라고 말하여 삼고초려를 유도한다. |
세계 무형유산으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문화적 기준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는 무형문화유산의 집합체이자 역사적, 예술적 민족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언어학적, 문학적 관점에서 뛰어난 가치가 있는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문화적 표현일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판소리가 이 같은 기준을 거뜬히 통과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가 바로 「적벽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의 결론은 적벽(赤壁)에서 적벽대전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적벽대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삼국지』를 통해 적벽대전을 익히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에 대한 인기는 근래 개봉되어 크게 흥행에 성공한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1), (2)」로도 알 수 있다. 아시아 영화로는 드물게 80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이고, 양조위, 금성무, 장첸, 조미 등 중국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 했다.
더구나 적벽대전은 오딧세이의 트로이전쟁, 아틸라의 살롱전투,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등과 견줄 수 있는 동양 최대의 전쟁으로 워낙 광대한 스케일이므로 영화로 제작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평이 있었지만 적벽대전을 스크린에 옮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는 아시아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하는데 조조의 80만 대군, 거울을 이용한 전투, 팔괘진 전투 등 소설로서는 다소 정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을 스크린을 통해 제대로 재현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특히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인 제갈량과 주유,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손권, 조조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금까지 『삼국지』를 원작으로 만든 어떤 영화들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흡사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하튼 「적벽대전 (1), (2)」을 보더라도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의 파괴력을 볼 수 있는데 적벽대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애초에 조조와 유비, 손권과의 전투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적벽대전으로 알려진 전투가 적벽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에 하나인 소위 적벽대전은 적벽이 아니라 오림(烏林, 현재 하북성 홍호현 동북쪽 장강 북쪽 연안)에서 일어났다는 설명이다. 판소리 「적벽가」가 아니라 「오림가」로 불려야 한다는 뜻이다.
베스트셀러 『삼국지』의 파괴력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전투를 꼽으라면 어느 전투가 제일 중요하다고 단정해서 이야기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크므로 시대별 전투의 성격은 물론 파급 효과 등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진다.
그러나 전투 사상 가장 흥미 있는 전쟁의 시기를 꼽으라면 비교적 쉽게 말할 수 있다. 한 제국의 성립과정에서 일어난 ‘초·한전’과 한 제국의 패망 이후의 ‘삼국쟁패’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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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의 삼고초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관우 장비와 함께 세 번을 찾아간다. |
‘초·한전’은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한나라라는 통일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혈투를 벌인 전쟁이다. ‘삼국쟁패’는 그 초한전의 승자인 유방이 세운 한 제국의 패망에서부터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서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싸웠던 전쟁이다.
이 두 전쟁은 대중들에게는 가장 돋보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전쟁이다. 이 때문에 이 두 전쟁은 초한지와 삼국지라는 문학으로 대중들이 즐겨 읽는 고전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삼국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토가 결국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거의 100여 년에 걸친 혈투를 벌이는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갖게 한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갈리고 또 항상 영웅이 나타나지만 이 두 시대처럼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만큼 두 시대의 전투가 박진감 있게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반면 그 시대의 전투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컸다는 말도 된다. 아무튼 이 두 전쟁에 대해서는 상세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물론 두 시대는 여러 면에서 서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초·한 간의 쟁패 시기에는 인재가 한 편으로 몰려있어 곧바로 통일 제국이 성립될 수 있었지만 삼국시대의 인재들은 각각 세 집단으로 나뉘어 혈투를 벌였기 때문에 중원이 통일되지 못하고 결국 삼국으로 분리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역사가들은 중국이 삼국시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적벽(赤壁)에서 벌어졌다고 알려진 이른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손권·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배한 사실을 든다. 더욱이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조조가 손· 유 연합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가 많았을 뿐 아니라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에 대한 내용은 매우 불확실하다.
그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국의 정사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에서처럼 명료하지도 않을 뿐더러 요약되어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나관중의 『삼국지』의 영향이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보다 엄청나게 커져 적벽대전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이 나관중이 그린 『삼국지』의 내용을 진실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격히 따져보면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속하는 『삼국지』는 정확치 않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얼버무려 마치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처럼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이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판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달라지므로 독자들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필요가 없이 흥미 있는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베스트셀러는 책의 내용 여하를 불문하고 많이 팔린 책을 가리킨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든 그 책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에게는 독자들을 빠져들게 하여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 상상력과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이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삼국지』에서 다루어진 내용이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식자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로 알려진 ‘적벽대전’이 실제로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학자들은 역사상 ‘적벽대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여 말한다. 이른바 ‘적벽대전’이 실은 적벽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유비가 용을 얻다
『삼국지』 전반부에서 조조는 동탁과 원소 세력이 제거되자 명실상부한 후한의 실권자가 됐지만 중원을 확보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 남아 있었다. 바로 유비 세력이다. 유비는 당대의 군벌들과는 달리 특정한 거주지가 없고 출신도 돗자리를 만드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지만 항상 세간의 높은 지명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漢)제국의 황제와 같은 유씨로 소위 족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군벌들은 유비가 자신보다 부상하는 것만 견제할 수만 있다면 그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에 손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돗자리를 짜던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곳에서 예우와 환영을 받은 이유이다. 원소가 실패한 후, 유비가 형주(荊州)로 나가자 유표(劉表 142~208)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그를 맞은 후 상빈으로 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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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중에 있는 제갈량 동상 |
건안 12년(207년), 조조가 북으로 오환(烏桓)을 정벌하러 나서자 유비가 유표에게 이때를 타서 허현을 습격하라 말했지만 유표는 응하지 않았다. 이때 유비에게 큰 행운이 따른다. 유비가 삼고초려의 형식을 빌려 그의 제일 중요한 참모라 할 수 있는 제갈량(諸褐亮 181~234)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삼국지』는 온통 제갈공명의 무대가 된다. 실제로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 유비· 손권이 아니라 제갈공명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이다.
여하튼 조조는 북방에서 위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기마민족인 오환을 격파하여 휘하에 편입시킨 후 삼공(三公)제도를 폐하고 유비를 제거하기 위해 하후돈(夏候惇 ?~220)을 총대장으로 하여 박망성(博望城)으로 진출한다.
조조가 우선 유비를 격파해야 한다는 뜻을 세운 것은 자신보다 명성을 얻고 있는 유비를 계속 자라게 한다면 결국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이런 생각은 중국의 고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유명한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 관계이다. 초·한 간의 전반적인 전투를 볼 때 승자는 항상 항우였고 유방은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유방인데 그 이유는 유방이 항우보다 백성들로부터 높은 신임, 즉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조는 유비가 자신을 넘보기 전에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론을 말하자면 조조의 생각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 유비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하는 부하들은 없었지만 유비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고 조언했다. 그가 얻은 무기는 바로 제갈공명이다.
조조가 제갈량의 친구로 이름이 높았던 전략가인 서서(徐庶 ?~230년경)에게 제갈량의 재주가 어떠냐고 묻자 천하의 서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반딧불이의 형광(螢光)이라면 제갈량은 호월천리(晧月千里)의 밝은 달입니다.’
나관중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설정하고 서서의 입을 통해 그를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는데 그것은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임은 물론이다.
서서는 영천 사람으로 제갈량의 ‘융중 문화 살롱’에서 함께 교유한 친구 중의 친구이다. 융중이란 제갈량이 유비에게 발탁되기 이전에 기거했던 곳으로 그는 융중에서 당대의 소위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여하튼 유비의 책사로 융중 문화 살롱 멤버인 서서가 제일 먼저 발탁된 후 제갈량을 곧바로 천거했다. 이때 서서는 제갈량은 절대로 부른다고 달려올 사람이 아니므로 직접 찾아갈 것을 권했다. 유비가 제갈량의 존재를 알고 세 번 찾아가 겨우 그를 만났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제갈량이 스스로 유비를 찾아가
『삼국지』에 나타나는 삼고초려는 다음과 같다.
서서의 말을 들은 유비는 제갈량을 청해 천하를 얻기 위해 관우·장비와 함께 그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이 집에 있지 않아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며칠 후 제갈량이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유비는 다시 관우·장비와 함께 눈보라를 맞으며 찾아갔으나 제갈량이 마침 외출하여 다시 한 번 허탕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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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중 살롱의 사마휘, 사마휘는 융중살롱을 열어 당대의 지식인들의 모임을 만들었다(좌로부터 최주평, 방통, 사마휘, 석광원) |
세 번째에 비로소 제갈량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유비는 제갈량이 천하의 형세를 매우 예리하게 분석하는 데 탄복했고 제갈량도 유비가 세 번이나 자신의 초가집을 찾아온 것에 감동하여 산을 내려가 돕겠다고 말했다.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로 모시고 관우·장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에게 공명이 있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그러나 『삼국지』에 그려진 삼고초려에는 다소 이견이 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제갈량이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갔지만 유비는 제갈량과 면식이 있는 사람도 아닌 데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 서먹서먹하게 대했다.’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으로 유명한 삼고초려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기록이지만 『위략』의 다음 글을 보면 유비가 제갈량을 계속 박대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우대한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둘 사이가 서먹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신임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제갈량의 계책을 따르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유비는 제갈량이 뛰어난 계책을 가졌음을 알고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이 설명만 보면 삼고초려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위략』의 기록을 볼 때 제갈량이 스스로 북쪽으로 유비를 찾아간 것도 사실이며 유비가 추후 세 번 찾아가 초빙한 것도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갈량이 유비의 책사가 될 때 유비의 나이는 48세, 제갈량의 나이는 27세였다.
유비가 처음에는 의기투합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약간 삐진 제갈량을 초빙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제갈량을 보다 부각시키기 위해 서서(徐庶)를 또 한 번 극적으로 활용한다. 서서는 208년 조조가 형주를 치자 유비를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어머니가 조조 군사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부득이 조조 수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도 강골이라 서서가 유비를 섬기기를 바라며 자살을 한다. 이후 서서는 마음을 항상 유비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조조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서서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이문열은 이의 원형을 『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항우가 유방 휘하에 있던 장수 왕룽의 어머니를 잡아 회유하는 장면으로, 이 부분에서 왕룽의 어머니는 유방이라는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 항우에게 가지 말라며 목을 찔러 자살한다는 것이다.
나관중이 『삼국지』를 저술하면서 단순하게 동 시대의 단편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체 역사를 아우르면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임을 다시 한 번 알려주지만 역사를 마음대로 각색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서가 조조 진영으로 들어간 후 아무런 계책도 내놓지 않고 죽는 날까지 유비에게 충성을 지켰다고 했지만 이것도 사실과 부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서서가 단 한 번도 계책을 내놓지 않았다면 그는 위나라에서 우중랑장(황제의 시종관)과 어사중승(전국의 지방관들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직책)조차 임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두 관직은 제갈량에 비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이 사실로 제갈량조차 서서의 품계가 너무나 낮다고 아쉬워했다. 228년 제갈량이 북벌할 때 위나라에 있는 서서의 벼슬이 높지 않은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을 정도이다.
“위나라에 인재가 그렇게도 많은가? 어찌하여 서서와 석광원(石廣元) 같은 사람이 중용되지 않는가?” (계속)
참고문헌 : 『중국을 말한다(7)』, 구청푸 외, 신원문화사, 2008 『제갈량 문화 유산 답사기』, 제갈량편집팀, 에버리치홀딩스, 2007 「적벽대전 실제 기록은 1페이지도 안 돼」, 배영대 외, 중앙일보, 2008.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