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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지의 과장된 묘사 - 병력

왕풍뎅이 2010. 7. 11. 02:37

삼국지(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삼국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서적이며, 심지어 삼국지 마니아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소설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즐겨 읽는 삼국지는 과장된 부분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병력에 관련된 부분이다. 그렇다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병력 수의 진실은 어떤 것인지,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나관중의 『삼국지』에는 지나치게 많은 병력과 인원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등에는 모두 100만 이상의 대군(大軍)이 동원되고 있다. 당시의 사정으로 봐서 이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이릉대전의 경우에는 촉(蜀)의 남녀노소 전체 국민을 동원해도 이 정도 병력을 동원할 수 없는 형편이다.

 

기록상으로 천하통일을 이룬 진나라의 최대 병력도 90만이 안된다. 물론 과거의 전쟁에서 묘사된 만(萬) 명이 단순히 숫자 1만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秦)나라의 경우 남자 100명 가운데 50명은 농경에 종사하고 50명은 병력에 종사했다고 한다. 복무 연령은 23세부터였다. 처음에는 소속 군현에서 1개월을 보내고 중앙군에서 1년, 변방에서 1년을 근무해야 했다. 진나라는 통일 전에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도 오늘날의 자료처럼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고대의 전쟁에 동원된 병력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인구 조사가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설령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시대의 기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가중된다.

 

전쟁은 귀족들의 특권이자 의무이지만 고구려의 경우에는 4세기 이후 전쟁의 규모가 커져서 일반 평민들도 전쟁에 투입되었다. 물론 중국의 경우에는 훨씬 이전부터 일반인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쟁에 투입되는 연령층의 남자를 정남(丁男)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촌락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정남은 전체 인구의 21%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만약 인구가 100만이라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은 20만 가량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국가적인 대전(大戰)일 때 한하는 것이고, 이 20만 가운데 경제활동 인구를 제외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국가의 대사로서 경제력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경제 활동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삼국지』에 나타나는 병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위, 오, 촉이 정립되던 당시의 인구 현황을 대충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그 당시의 기록(진수의 『삼국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 위(魏): 66만호(인구 440만). 병력 20만~50만

* 오(吳): 52만호(인구 230만), 병력 15만~20만

* 촉(蜀): 28만호 (인구 94만), 병력 8만~12만

 

 여기서 말하는 호(戶)가 몇 명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게는 5~6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위의 수치도 그 정도로 추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연구이기는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까지 양민들은 하루 세끼 600g을 먹고 살았고, 군인이나 노동자는 660g 정도를 섭취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고대의 논 1결당 면적은 1천~1,500평으로 추정되며 고려 전기에는 논 1마지기(300평)당 비옥한 토지는 71.7~154.5kg, 비옥도가 낮은 토지는 33.7~72kg 정도를 수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통계를 기반으로 한다면 위, 오, 촉의 삼국지 시대에는 농경기술이 떨어져 비옥도를 낮게 보아야 하므로 대체로 40kg 이하로 추정해야 할 것이다. 즉 논 300평당 생산량은 약 34kg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상전(上典)의 경우는 1천 결 가운데 1~2결에 불과하다는 『세종실록』의 사료도 있다.

 

 둘째,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6년의 기록을 보면 707년 춘궁기에서 가을 수확기까지 기아민(飢餓民)들에게 하루 1인 3승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의 1승(升)을 200ml로 본다면 600ml(480g)에 해당된다. 고려의 경우 노동자 3만 명의 하루 세 끼 식량으로 3개월 간 3만 4천 석을 소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환산하면 당시의 군인 노동자는 1인당 하루 660~993g을 소비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의 일반인들은 극빈층(480g)보다는 많고 군인, 노동자(660~993g)보다 적은 600g 정도를 하루 식량으로 소비했을 것이다.

 

셋째, 나관중의 『삼국지』에는 과장된 표현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는 병력을 지탱하는 인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국유사』권2 성덕왕편에서 서기 707년 구제곡(求濟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곡식이 정월 초에서 7월 30일까지 7개월간 총 30만 500석이라고 했다. 1인당 하루 3승 지급이므로 7개월간 1인당 630승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석(가마)=15두(또는 20두), 1두=10승이므로 구제받은 빈민은 300,500×15(또는 20)÷10×630이므로 대체로 7만~9만 명 선이 된다.(설마 이걸 계산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이상의 연구는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것이지만 위, 오, 촉 삼국이 정립하던 시기를 충분히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연구에서 보면 10만 명의 병력이 1개월 간 동원되어 전쟁을 치를 경우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다. 군인이므로 원래는 900g까지 소비할 수 있겠지만 거의 700여 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기 때문에 대략 700g 정도 소비한다고 보고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 병사 1인당 하루 곡물 소비량: 3.5승(700g)

* 병사 1인당 1개월 곡물 소비량: 3.5×30=105(10두)

   1석(石 · 碩)이 15두(斗)일 경우는 0.7석

* 10만 명의 1일당 곡물 소비량: 7만 석 ÷ 30= 2333.4석

* 10만 명 전체의 곡물 소비량: 0.7석×10만= 7만 석

 

결국, 10만 명의 군대가 1개월 동안 전쟁을 치르는데 7만 석의 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한 수레에 10가마 정도를 싣는다고 하면 1개월 동안 수레가 7천 대 필요하고 수레로 하루하루 공급한다면 하루에 234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원정군의 경우에는 보급로가 길어지므로 매일 매일 하루에 234대의 수레가 전쟁터로 옮겨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10일 간격으로 지속적인 보급을 한다고 가정하면 최소 234×10, 즉 2340대 이상의 수레가 필요하다.

 

그런데 나관중의 『삼국지』는 이 같은 점이 고려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관도대전은 위, 오, 촉 삼국이 정립되기 전의 상황인데 70만 이상의 군대를 일개의 제후가 동원하고 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만약에 7명의 장정이 한 달에 쌀 2가마를 소비한다면 전쟁을 3개월 이상 치르기 위해서는 42만 가마가 필요하다. 이것은 일체의 부식을 제외한 것을 말한다. 설령 이것을 10일 간격으로 분산시켜 돌아가면서 공급한다해도 1개월에는 14만 수레 분량의 가마를 옮겨야 하므로 14÷3=4.7만여 대의 수레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삼국의 정립기 이전에 유력 제후들이 총력을 다하여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최대로 잡아도 5만~10만을 넘지 못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관중 『삼국지』에서의 내용으로도 병력을 추정할 수 있다. 조조가 기주를 점령한 후 최염을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삼고 "기주 호적을 보니 총 인구가 30만"이라고 하였다. 만약 기주 인구가 30여 만 정도라면 그 가운데 남자는 15만 정도이며 남자의 3분의 1이 장정(壯丁)이라면 5만 정도인데, 그 중 경제활동 인구를 50% 정도라고 추정하면 최대 2만 5천 정도의 병력을 동원수 있다.

 

또 다른 분석 방법이지만 「신라의 촌락문서」의 기록에 따라 전체 인구의 20% 정도를 정남(8만 명)으로 보고 그 가운데 50%(4만명)를 병력으로 동원한다면 대개 4만여 명 정도의 군대를 동원하게 되는데, 이 수치도 대체로 위의 분석과 비슷하다.

 

그런데 기주는 다른 주에 비하여 비교적 넓은 지역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대개 하나의 주를 장악한 제후들은 최대로 잡아도 1만 5천 내지 2만 정도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을 것이고, 원소와 같이 유주, 병주, 청주, 기주 등의 4개 주를 장악할 정도가 되면 8만~10만 정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에 따르면, 중원을 통일하는 전쟁이었던 관도대전에서 원소는 정병 10만을 이끌고 근거지인 업을 출발하였다고 나오는데, 그것으로도 병력의 숫자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지 전반에 나타나는 과장된 병력의 규모를 합리적인 숫자로 제시해야 한다. 이는 삼국지를 개작하려는 게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사실에 맞게끔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교훈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참고 :  김운회 외, 『삼국지 해제』, 김영사,  pp. 55~60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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