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역사

[스크랩] 일본열도로 진공한 해양강국 신라

왕풍뎅이 2011. 1. 18. 23:22

해상강국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있을 것이다. 바로 백제다.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백제는 저 멀리 동남아와 인도와 교류를 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바다 건너 중국에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기도 했으니, 백제=바다의 강자 라는 등식이 성립이 된다. 신라는 경주를 수도로 하여 한반도 동남방에 위치한 국가다. 그래서인지 신라를 바다와 인연이 없는 나라로 간주하기 쉽다. 하지만 신라 역시 백제에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해양강국이었다.

 

 

 

 신라는 건국초부터 바다와 인연이 있었다. 신라 석씨 왕계의 시조인 석탈해의 신화를 보면 다파라국 왕자 석탈해가 바다를 이용해 신라 아진포라는 항구에 도착했다고 나와있다. 석탈해는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며 아진의선 할머니를 봉양했을 정도로, 수산자원이 풍부한 동해안에서 어업이 신라에서 차지한 비중은 컸다.

 

신라가 바다를 운용한 예는 지증왕 13년(512) 우산국 정벌에서 알 수 있다. 지증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는 동해바다 한 가운데 있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 정벌에 나서게 된다. 망망대해에 존재하는 섬나라, 그것도 당시의 항해술에 비추어 볼 때 군도(群島)를 이루지 않은 작은 섬 하나를 찾아나선다는 것은 바다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우산국 정벌을 통해 신라가 바다를 잘 알고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 17관등  중 제4관등인 파진찬(波珍찬)은 '파달찬'으로 불리우는데 이는 '바다 칸'이란 의미로, 바다를 관장했던 직책에서 유래한 관등이다. 파진찬은 일며 해간(海干)이라고 불리운다. 바다를 관장하는 직책이 고위 관등인 점을 미루어볼 때 신라가 얼마나 해양을 중시했는지 알 수있다.

 

해양을 중시했던 신라의 선박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금관총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 구조를 살펴보면 선박의 앞뒤가 높이 솟아있고, 뱃전 위에 널판때기를 한두 장 더 이어 올렸다. 이로보아 하천이 아닌 파도가 높은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으로 추정된다.

 

복원 신라선 모형

 

신라의 조선술은 일본측 기록에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왜(일본)에 조선술을 가르친 이나베씨의 선조는 신라인이고, 639년 당나라 승려들이 신라의 송사(送使)를 따라 왜로 왔으며 649년에는 왜의 승려가 신라 선박 편으로 당나라에서 귀환했다. 658년에는 왜의 승려 두 명이 신라 선박을 이용하여 당나라에 유학가기도 했다. 이렇듯 왜가 신라 선박을 이용하려 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 선박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백제를 능가했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752년, 신라에서 선박 1척에 100여 명이 승선할 수 있는 7척의 거함으로 일제히 북규슈를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고, 839년 북규슈의 다자이후에서 '신라선'을 만들었는데 풍파에 잘 견디었다고 한다. 이렇듯 신라인들은 왜인들에게 조선술을 가르쳤고, 그들의 조선술, 선박은 왜인들에게 우수하다며 칭송을 받았다.

 

백제 못지 않게 해양의 중요성에 눈을 뜬 신라는 진평왕 5년인 583년에는 병부에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여 선박 사무를 관장했고, 문무왕 18년인 678년에는 선부령(船府令) 1명을 두어 선박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병부와 동격인 선부를 설치하고 장관급에 해당하는 령을 두었다는 것은 해상을 관장하는 선부의 비중이 막중했음을 뜻한다. 선부가 국방부에 해당되는 병부와 동급으로 자리하는 경우는 중국, 일본에는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였다. 이는 신라가 바다를 굉장히 중시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신라가 당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 불완전하지만 삼한일통을 이루어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해전에서 승리하여 바다를 장악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을만큼, 신라는 바다의 중요성을 백제, 고구려 못지 않게 인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학자 신숙주가 저술한 『해동제국기』를 보면 신라와 관련된 재미난 기록이 보인다.

 

(민달천황) 6년 신축에 경당으로 연호를 고치고 3년 만인 계묘에 신라군이 서쪽 변방으로 쳐들어 왔다

 

민달천황이 경당으로 연호를 고친 신축년은 581년이다. 계묘년인 583년에 신라군이 일본열도의 서변인 북규슈 일대를 침공했다는 기록이다. 신숙주가 이 기록을 어느 문헌에서 인용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신라의 일본침공 전승이 일본측 문헌에 전해왔음은 사실인 것 같다.

 

신경준의 『여암고』 역시 신라의 일본침공 기사를 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일본 응신천황 22년, 신라 군사가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阪:오사카)과의 거리가 백 리였으므로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달라고 액러하여 백마를 잡아서 맹세하였다. 호원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이키시마)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다. 그러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라가 일본에 쳐들어갔다는 통쾌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일본을 왕래했던 조선통신사들의 기행문에서도 자주 소개되었다. 1636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바 있는 김세렴은 『해사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남겼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 없다. 단지 그 『연대기』를 보면 왜왕 응신 22년, 신라 군사가 명석포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오사카에서 겨우 1백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한 구릉이 있는데 왜인이 이것을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을 애걸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1년에 해당하는데,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이다. 그러나 동사(東史:한국사)에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신라의 일본열도 진공을 아는 사람은 몇이 될까? 그동안 우리는 신라를 약소국, 비굴외교로 고구려, 백제를 이민족에 팔아넘겼다고 극단적으로 비난을 해왔다. 하지만 신라 역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였다. 일본에 조선술을 가르치고, 일본열도로 진공하여 신라의 기상을 떨친 나라였다.

 

참고로 신라는 광활한 교역 반경을 확보하고 있었다. 신라와 동남아시아 지역 간의 교류, 아랍과의 교류 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진평왕 20년인 598년, 신라는 공작 한 쌍을 왜에 선물로 보낸 바 있다. 공작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동물이다. 신라가 왜에 공작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은 신라가 동남아시아와 교류를 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신라가 남긴 유물인 토우를 보면 한반도에서 볼 수 없는 동남아시아 서식의 개미핥기와 물소 토우를 비롯하여 원숭이 토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토우들은 실물을 보지 않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이같은 유물을 통해 동남아시아 서식 동물들이 신라에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신라가 이들 지역과 긴밀한 교류를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개미핥기 토우

 

고대 우리민족은 바다를 누볐다. 해상제국 고구려, 해양강국 백제, 그리고 바다의 강자 신라...

바다의 중요성을 깨닫고, 바다를 개척한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런 역사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 : 이도학,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 김영사, 2001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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