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역사

[스크랩] 신라의 만주와 대륙경영(현 복건성 신라구)

왕풍뎅이 2011. 2. 8. 23:24

 송준희 (2005-07-31 17:12:52, Hit : 3874, Vote : 349
 신라의 만주와 대륙경영





- 출처 : 주간현대 (글 : 신완순/명지대 교수)
- 신완순님은 현재 주간현대(주간신문 36면)에 고정역사칼럼을 연재중에 있습니다(1면 전체할애)
- 지도 등 그림은 운영자가 임의로 삽입하였습니다





(신완순) 신라의 만주와 대륙 경영


중국과 대만의 양안문제로 관심을 끌고 있는 지역이
중국의 복건성지역인데, 이 복건성 지역에 신라(新羅)라는 지명이 있어 소개를 한다.

복건성 용암시(龍巖市) 신라구(新羅區: 구(區)는 중국의 지방정부의 단위조직으로서
우리나라의 대도시의 직할구나 시.군을 말함)가 바로 그 곳이다.

용암시 신라구 지방정부의 홈페이지(http://www.fjxinluo.gov.cn/)에서
신라구에 대한 소개를 하면,

"용암시 신라구(新羅區)는 복건성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룡강 상류에 있고, 하문(廈門)과 마카오 등지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라구는 민서의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이며,
민남의 금삼각(金三角)의 복부에 해당된다. ....

신라구의 역사는 유구하여 당나라 개원24년(736년)에 신라현으로 설치되었다.
당나라 천보원년(742년) 다시 용암현을 두었다.

1981년 현을 없애고 시를 두었다.
1997년 3월 용암시에 신라구를 설치했다.
3개향과 12개의 진과 12개의 가도 사무소가 있으며,
면적은 2,677 평방미터이고 인구는 45만명이다.

홍콩, 마카오, 대만과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10만명이다.

이 곳은 아름다운 토지와 산이 푸르고 물이 수려하다.
4계절이 봄 같으며, 기후는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그림1) 복건성 용암시에서 소개하고 있는 신라구의 위치


위 신라현에 대한 기록으로는
<진서(晉書)> 지제오(志第五) 지리(地理)하편에

"진안군(晉安郡)은 진나라 태강3년(282년)에 설치하였는데
8개의 현(縣)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라현(新羅縣)이다."

라고 되어 있어 이 곳에 신라현이 설치가 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대에 교간된 <진서>에는
천주에 있는 신라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아 놓았는데
"신라성이 정주부의 동남에 있다." 라고 되어 있다.

정주(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장정(長汀)을 말한다.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신교(新橋)와 나방(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또한
복건성 북쪽의 양자강 하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절강성에 닿는데,
이 일대도 신라의 강역이었음이 역사상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여러 지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쪽에 신라산이라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대륙의 남단인 이곳 절강성 일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의 기사에
"15년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림2)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圖)"상의 절강성 임해현과 "신라산

또한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30대 소성왕 2년의 기록과 46대 문성왕 때의 기록에는
"평의와 임해의 두 전을 중수하였다." 는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절강성 및 복건성 등지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것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21대 문자명왕이 백제의 요서군과 백제군을 폐하면서
신라의 백성을 복건성 천주라는 곳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가 대륙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권제37 (잡지 제6)지리/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에서
360여개의 지명에 대하여 이름만 있고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하였는데
위의 장령과 천주도 김부식은 모른다고 하였다.


신라의 구주(九州)는 만주지역까지이다.


우리는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강역이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한반도의 남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배워 왔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설로 보고 있지만

청나라 시대 건륭 42년(1777년) 한림원에서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의 강역을 현재의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구당서>에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삼고
그 왕 김법민을 계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당서>의 신라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며
금성의 둘레는 8리이며 그 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라는 한나라 시대의 낙랑지역에 할거하였고
횡으로 천리이며 종으로는 삼천리였다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계림은 현재(청나라 시기)의 길림이라 하였다.

계림(鷄林)과 길림(吉林)은 우리 발음으로는 달리 부르지만
중국 발음으로는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으며
현 길림이라는 지명이 신라의 계림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을 한다.

또한,
신라의 구주(九州)를 설명하는 항목에서는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오늘날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족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라고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나라 현종 713 ~ 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구주(九州)의 설치는 동쪽으로 길림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에 이른다"고 되어 있어
길림 광녕이 현재도 있고 광녕 근처에 철원 개원이 있으니

신라의 서쪽은 개원 철령 광녕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나타내고
동쪽은 길림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에서 서쪽은 개월 철령까지라고 하였다.





(그림3) <해주, 광령, 철령, 개원, 길림 위치도>

위의 대륙의 절강성 복건성 지역에서 살펴본 신라의 활동 영역과
<만주원류고>에서 밝힌 신라의 구주를 만주 지역까지 비정한 것을 놓고 보면
독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고 있으며 이는 터무니없는 기록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주원류고>는 청나라에서 발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옛 선조인 숙신과 예맥 부여 삼한 백제 신라를 하나의 원류로 보고 있으며
만주를 중심으로 역사의 강역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것은 우리가 여진이나 거란 등을 북방의 오랑캐로 보고 있는
조선시대의 역사관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과도 큰 차이를 보고 있다.

<만주원류고>는

삼한(三韓)의 한(韓)도 왕을 지칭하는 칸(可汗)에서 비롯된 것이며
부여의 오가(五加)의 가(加)도 가(家)임을 밝히고 있으며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는 사실과
25사와 다른 사서를 인용하여 대륙경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강역을
한반도 중심으로만 보는 경향이 너무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자주적인 역사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외래의 힘에 눌려 안주하려는
과거의 패배주의적 반도사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의 힘과 논리에 휩싸여
우리의 참역사를 밝히는 일을
우리는 너무도 외면하고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밝히고 알리는 것만이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통일을 이루는 길이며
찬란했던 옛 역사를 복원하는 길이
우리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길이라 생각된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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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중국고지도 "주경도" 상 "신라산")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圖)"상의 절강성 임해현의 "신라산"이다

임해현 주위에
- 천태현
- 영해현
- 황암현
- 선거현

등이 표시되어 있다





(솔나무님이 오래전에 올려주신글)






"KBS 최인호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 5부 [역사는 흐른다]"
에서 방영한 내용


(신라산 지명에 대한 설명내용)

“신라상인이 여기에 죽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정리해서 여기다 묻었다.
그 산은 풍수적으로 보면 위치가 비교적 좋다.

신라인들이 모여 산 곳이 통원방이다.
그래서 신라인이나 디른 기타 상인도 포함해서 모이므로, 이쪽이 통원방이 됐다.“

(완)

출처 : 민족회의
글쓴이 : 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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