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 궁궐 터에서 족구를?
오마이뉴스 | 입력 2011.04.02 15:55 | 수정 2011.04.02 16:45
[오마이뉴스 하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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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은 마한의 제6대 효왕 때 백제와 변한, 진한의 침략으로 인하여, 지금의 지리산 피앗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피신하며 지은 궁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의 일이다. 한반도 서남부에 있던 마한이 어떻게 이곳 지리산 속으로 옮기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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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의 직제상으로는 각각의 부족에게는 족장이 있고, 큰 부족의 통솔자는 '신지'라 하며, 그보다 작은 부족의 인솔자는 '읍차'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54개 부족국가로 형성된 마한이 이곳 달궁을 거점으로 70여 년을 존속하였다고 하면, 아마도 이 달궁 일대에 거대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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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 전남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를 넘었다. 피앗골 안에 자리하고 있는 와운마을을 찾아가다가 만난 달궁. 그저 지나칠 뻔하다가 다시 돌아간 곳이다. 달궁의 터라는 곳에는 여기저기 돌들이 쌓여 있다. 그리고 나란히 선 주춧돌이 보인다.
정령치, 성삼재, 팔랑치 등의 이름은 모두 이 달궁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 용성지 > 에 보면 "서산대사의 '황령기'에 한 소제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침략을 받아 피신하여, 도성을 쌓고 유지한 것이 71년이었다. 무너진 성과 허물어진 벽이 지금도 남아있어, 세상에서는 달궁터라고 전한다"고 하였다.
달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남아 있는 주춧돌을 보면 대개 이 달궁에는 네 개 정도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의 도로가 난 곳을 정면으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동서로 길게 나 있는 주춧돌이 있다. 그리고 그 좌측으로, 지금의 달궁 주차장 편으로 길게 두 줄로 된 또 한 무더기의 주춧돌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축대를 쌓은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아래에도 주추가 두 군데 보인다. 이런 형태로 볼 때 달궁은 모두 네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아마도 마한이 멸망하고 난 뒤에도 많은 백제의 유민들이 이곳 달궁 인근에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계속 항거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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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 터를 돌아본다. 누군가 한 편에 족구라도 할 양인 듯, 지주대를 세워놓았다. 참 이렇게 문화유적에 들어와 개념 없는 짓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 족구를 할 장소가 그렇게 없는 것일까? 문화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이 나라 백성이라는 것이 한심할 뿐이다.
달궁 터에는 여기저기 돌무더기가 있다. 마른 풀 더미에 가려져 있어, 주춧돌의 형태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들도 있다. 아마도 마한의 유민들이 이 지리산 속 첩첩산중 계곡에 들어와 잃어버린 나라를 기억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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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달궁. 이제는 그 주춧돌만이 옛 흔적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이곳이 정말 달궁이었는지, 그리고 그 주춧돌이 널린 곳이 마한의 옛 궁이었는지, 그런 것들을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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