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영토의 북방한계선은 송화강 일대
고려 영토에 대해 국사교과서에서는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이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넓었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 치부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료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면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넓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
『고려사』「지리지」서(序)를 보면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그(고려)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高句麗) 때보다 확장되었다.
『고려사』권56 「지리」
고려영토의 동북쪽이 고구려때보다 확장되었다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역으로 보면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고구려의 동북계보다 넓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국사교과서에는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한반도를 넘지 못했다고 나와있을까? 이는 조선전기에 편찬된 지리지의 인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고려 고종 18년 이후 몽골이 고려를 침범하면서 고려 동북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변태섭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고종 1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양계(羊界:북계와 동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해도(海島)로 들어가고, 다시 남쪽지방으로 옮겨 임시로 거처했으며, 덕주 같은 곳은 주의 치소가 5번이나 옮길만큼 이사(移徙)가 심했다고 한다.
치소의 변천은 덕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몽골의 침입으로 동북계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주(州)나 진(鎭)들의 위치가 옮겨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몽골의 침입으로 동북계의 지명이 변화되고, 원 간섭기를 거치며 심화되었을 것이다. 동북계 지역을 몽골이 지배하면서 치소가 바뀌고, 훗날 조선이 동북면의 여진을 쫓아내고 4군6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지명의 이동 및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혼란은 고려의 동북쪽 영토의 정확한 인식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의 기록은 조선초기에 고려의 동북쪽 영토에 대한 지리적 인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세종실록』 권59 15년 3월 20일(계유)
누구보다도 통치지역에 대한 정보가 많았을 한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조선의 왕이 고려의 동북쪽 영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전기에 고려시기 동북계에 대해 정확한 지리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조선의 고려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국사교과서에서는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고려 당대의 기록들을 보면 고려의 영토가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넓었음을 알려준다. 송나라 시기 이도가 저술한 『속자치통감장편』을 보자.
(원풍 5년, 1082) ‘선조(先朝) 시기에는, 여진이 항상 등주(登州)에 와서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馬行道)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마행도가 고려에) 막혀서 끊겨, (여진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 조정이 고려와 더불어 왕래를 하는데, (고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여진의 사신은 끝내오지 않았다.
고려가 여진과 송의 교역루트인 마행도를 끊었다는 사료다. 당시 고려는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율하던 나라였다. 거란의 침입조차 제대로 막지 못한 송나라의 여진의 사신을 들여보내라는 말조차 무시할정도로 고려의 국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럼 고려가 막은 마행도의 위치는 어디일까? 마행도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가 송과 여진의 교류를 차단하려면, 압록강이나 두만강 이북의 교통로를 점령해야만 했다. 고려가 점령한 마행도는 두만강 이북방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지만, 고려로서는 압록강 이북의 마행도를 막아 거란을 자극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행도의 위치
여튼『속자치통감장편』의 기록은 고려의 군사가 함경남도 정평(定平)으로부터 두만강 이북을 넘어, 여진의 마행도를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마행도 점령을 일시적인 점령이라 보는 사람이 있지만, 일시점령이라고 하기에는 고려가 마행도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 여진과 송의 교역이 단절된 시간을 송 신종(연호가 원풍) 앞 임금인 영종(英宗, 1063~1067)으로 한정해서 살펴봐도 영종 1년(1063)부터 조서를 내린 신종 원풍 5년(1082)까지 19년 동안, 적게 잡아 신종 당대만을 놓고, 신종 1년(1068)부터 조서를 내린 원풍 5년(1082)까지 14년 동안 여진과 송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본다.
물자의 보급문제와 여진의 반발을 생각하면 함경남도 정평 이하라는 고려의 영토선에서 멀리 떨어진 두만강 이북에 군대만 19년 내지 14년동안 길목을 막고있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고려가 최소한 14년동안 마행도를 막고 있었다면, 고려가 지속적으로 송과 여진의 교류를 막았음을 의미하고, 이는 기존의 고려의 영토가 두만강 이북까지 진출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려가 두만강 방면의 마행도를 점령했을 가능성은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파견하여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권5 현종 17년(1026)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치고, 고려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율하는 나라로 발돋움하자, 동여진의 고려로의 귀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위 기사의 동북여진은 간도와 그 이북지역에 위치하고있는 여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란이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걸 거절할 정도로 당시 고려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또한 이 기사는 만약 고려의 영토가 지금의 압록강 하구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지역이라면 해석할 수 없는 기사다. 거란이 동북여진으로 가기 위해서 발해시기 교통로중 하나인 등주도를 통하는 것이 빠름에도 왜 고려 영토로 들어와 한반도를 동서로 갈라놓고 있는 백두대간을 넘어 함경도를 지나 간도지역으로 가는 경로를 택하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가는 루트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든다.
역으로 이 기록은 고려가 두만강 이북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가 두만강 이북을 차지했음은 물론, 여진의 교역루트인 마행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역으로 보면 고려의 마행도 점령은 적어도 1026년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거란이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고려에게 빌려달라고 한 『고려사』의 기사는 고려가 여진과 거란 사이의 길목을 차단하였고, 고려의 동북쪽 영토가 기존보다 넓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려의 최북단으로 알려진 정주(定州)의 위치에 대해 학계에서는 현재 함경남도 정평(定平)이라고 한다. 그리고 국사교과서, 한국사개설서에도 정주의 위치를 함경남도 정평에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정주가 함경남도가 아닌 두만강 이북에 위치했다고 알려주는 기사가 있다.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定州)로부터 대오를 정비하고 길주(吉州)로 가던 도중 나복기촌(那卜基村)에 도착했을 때 함주(咸州)사록 유원서(兪元胥)가 급보를 보내기를 “여진의 공형 요불(裊弗), 사현(史顯) 등이 성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제 아지고촌에 가니(昨到 阿之古村)에 가니 태사 오야속(烏雅束)이 화친을 청하려고 우리들을 보내면서 귀국 병마사에게 이 뜻을 전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전 중이므로 관문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바라건대, 우리가 있는 곳까지 사람을 보내, 태사의 말한 바를 상세히 전달받로록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윤관 등이 이 보고를 듣고, 성으로 돌아와서 다음날(翌日) 병마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仲)을 적진으로 파견하여 여진의 장군 오사(吳舍)에게 통고하기를 “강화하는 일은 병마사가 오로지 못하는 것이니 공형 등을 고려의 조정에 보내어 임금께 아뢰어보라”하니 오사가 대단히 기뻐하였다. 요불, 사현 등이 다시 함주로 와서 말하였다.
『고려사』권96 윤관 전
위 사료들을 보면 정주와 길주 사이, 그리고 정주와 함주 사이에 나복기촌이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지고촌은 완안부 여진이 살고 있는 아십하 유역의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阿城) 부근이다. 아지고촌에서 함주까지 여진의 사신 요불, 사현이 오는데 昨到阿之古村의 글귀를 통해 아지고촌에서 함주까지의 거리가 하루정도의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주를 기점으로 함주보다 먼 곳에 있는 여진촌락까지 하루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사료의 내용을 보건대, 여진과 접해있는 정주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부근 아성에서 하루 내지 이틀 정도의 거리 권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현재의 정설대로 정주가 함경남도 정평이라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다. 정주가 고려와 여진이 접촉하고 있는 곳이며, 고려가 여진의 마행도를 끊은 것을 들어 허인욱씨는 정주의 위치를 함경남도 정평이 아닌 중국 길림성 안도현 송강진(松江鎭) 부근이라 비정하고 있다. 참고로 송강진 송강둔에서 서북쪽 12리 떨어진 곳에 고려성유지(高麗城遺址)가 있다. 이는 고려의 영토가 길림성까지 미쳤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고려의 두만강 이북 진출 가능성은 다음의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29정 함주(咸州)로부터 90리를 가면 동주(同州)에 이른다. 함주로부터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또50리를 가면 동주에 이른다. 함주를 떠나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평지에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경작지가 넓고, 땅에는 기장을 널리 재배하고 있다. 동쪽으로 큰 산(大山)이 보이는데, 금나라 사람(金人)들이 신라산(新羅山)이라고 한다. 산의 내부는 깊고 멀며 도로가 없다. 그 사이에서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된다. 산속 깊은 지역은 고려와 더불어 경계를 이룬다. 산아래 길까지 30리 정도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
위 기록은 금나라 태종 즉위식에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허황종이 금나라를 여행했던 동안의 일정을 전하는 기행견문록으로, 『대금국지』에 전해지고 있는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일부분이다. 이 기행록은 금나라, 고려인이 아닌 제3국인이 기록한것으로 사료로서 신빙성이 높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은 신라산이라 불리우는 대산(大山)이 고려와 금(여진)의 국경선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대산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함주나 동주, 숙주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고려와 여진의 경계지역이 어디인지 대략적이나마 추정할 수 있을 듯 싶다.
『중국역사지도집』을 보면 함주는 현재 중국 요녕성 개원현의 개원노성이고, 동주는 요녕성 개원현 남중고진이라 한다. 현재 개원에서 북쪽으로 동북평원이라 불리우는 넓은 평야지대가 존재한다. 이는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함주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가면 평야가 펼쳐져 있다’ 는 기록과 합치된다. 결국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서 말하는 평야지대는 현재의 동북평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기록된 고려와 여진의 경계지역인 넓은 평야지대의 동쪽의 큰 산의 위치는 어디일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를 보도록 하자.
갈라로 군사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지난날에 해마다 고려 경계에서 물개와 해동청, 큰부리까마귀, 송골매를 잡았습니다.근래에 배 두 척을 가지고 갔더니, 저들이 14척의 전함으로 막고 공격해서, 두 배에 칸 사람들을 죽이고 그 병장기를 빼앗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금사』태종2년(1116) 5월 을사
금나라 군사가 연례적으로 고려의 경계에 가서 해동청(海東靑)을 잡았는데, 고려 군사가 공격해서 금나라 사람들을 죽였다고 보고를 올리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동청이다. 『금사』등의 사료에 의하면 해동청의 주산지는 오국부(五國府)라 기록되어 있다. 오국부는 여진의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그 위치를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의란(依蘭)지역으로 보고 있다.
오국부의 위치
그런데 고려의 전함이 여진인이 경계를 침입했다는 이유로 공격했다고 한다면, 고려의 영역과 오국(五國) 즉 의란 지역이 가까운 곳에 있어야만 한다. 이 말은 고려의 북방경계선이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보다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고려가 상경용천부를 영역으로 하고 있음은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짐(朕:요나라 도종) 하늘의 도움과 조상의 유훈으로 천하를 통치한 지가 이미 43년이나 되었다. 안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로 제후(諸侯)를 무마하여 다 옳은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귀국은 동방에 사직(社稷)을 세워 그 지역이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르고 서쪽으로 압록강에 접하여 있다. 삼가 정삭(正朔)을 받들고 공물을 보내왔다. ……"
『고려사』권12 숙종 정축 2년(1097) 12월 계사
이 기사는 요(遼:거란)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책문 내용 중 일부다. 주목할 것은 고려의 영토가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다다른다는 점이다. 이는 거란과 고려 양국이 용천이라는 지명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용천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용천은 고려와 거란이 대치하는 지역도 아니고, 고려의 큰 행정구역 명칭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용천은 고려와 거란이 공통적으로 알고있는 역사속의 큰 도시일 가능성이 높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불리웠고, 거란왕이 보낸 책문에 나타난 용천과 한자도 동일하다. 그렇다는 건 거란왕이 책문에 기재된 용천(龍泉)이라는 지명은 상경용천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금사』와 『고려사』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의 영토가 상경용천부와 그 이북지역까지 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들과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기록을 토대로 고려와 여진의 접경지인 대산의 위치를 추론해보자. 신라산이라 불리우는 대산이 고려와 여진의 국경선을 이룬다고 한 기록을 보면 대산은 현재의 산맥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도로나 운반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거대한 자연지형(산맥)이 국경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동북평원의 동쪽에 있는 산맥 중 하나가 대산일 가능성이 높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산이 깊고 멀며, 도로가 없을 정도’로 묘사된 대산은 사람이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산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산 아래까지 30리’라는 부분을 통해 대산을 통과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보이는 대산은 『고려사』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영가(盈歌)와 오야속(烏雅束)이 계속하여 추장으로 되어 자못 군중의 지지를 받게되자, 점차 그기세가 횡포하게 되기 시작하였다. 이위(伊位)의 경계선 지점에 연달아 산줄기가 있는 바 그것이 동해안으로부터 불끈 솟아서 고려 북부 국경까지 뻗쳤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무성하여 사람과 말의 통행이 지극히 곤란했다. 그 사이에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것을 ‘병항(甁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단 한 구멍으로 출닙하는 까닭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고려사』권96 윤관 전
고려사의 고려와 여진의 경계인 산줄기에 관한 기록은 『선화을사봉사행정록』의 대산에 대한 설명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럼 고려와 여진의 국경역할을 한 산맥을 찾아보자. 동북평원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장광재령과 서노야령, 길림합달령으로 이어지는 산맥과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있다. 산이 험하고 통행로가 거의 없다는 것을 근거로 경계가 되는 산맥을 찾으면,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사료에서 말하는 대산으로 보인다. 전자가 동북평원과 통하는 교통로가 많은 반면,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경우, 위호령을 넘는 길이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고려와 여진의 경계인 대산은 장광재령에서 위호령으로 이어지는 산맥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광재령과 위호령이 고려와 여진간의 경계가 되면, 발해의 상경용천부와 경박호 등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고려의 영토로 포함된다. 국사교과서, 한국사 개설서에는 고려의 영토가 함경북도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당대의 사료에는 고려의 영토가 두만강을 넘어 송화강 유역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고려사』, 『속자치통감장편』, 『선화을사봉사행정록』등의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고려는 상경용천부인 현재의 동경성을 넘어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의란과 가까운 부근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있던 고려영토가 진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 : 허인욱, 「고려 중기 동북계 범위에 대한 고찰」,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1
참고문헌
논문
허인욱, 「고려 중기 동북계 범위에 대한 고찰」,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1
허인욱, 「고려의 역사계승에 대한 거란의 인식변화와 영토문제」,『한국중세사연구』24, 2008
단행본
김창현,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 경인문화사, 2008
김창현, 『천추태후 역사 그대로』, 푸른역사, 2009
안형환, 『우리가 몰랐던 개방의 역사』, 다솜커뮤니케이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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