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역사

[스크랩] 드라마 근초고왕에 나오는 요서(遼西)는 어디인가?

왕풍뎅이 2011. 3. 24. 22:11

 

현재 KBS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백제의 고대지명을 대부분 현 한반도에 있는 지명으로 자막처리하고 있다. 그러면서 요서는 지금의 산동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막설명을 내보내고 있다. 게다가 근초고왕을 포함한 많은 백제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수시로 요서(산동성)에 들락날락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요서가 현 요녕성 요하의 서쪽이라는 현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역사이론과도 전혀 맞지 않고 있다. 현 요하의 서쪽이라면 요녕성 서부의 금주(錦州)나 하북성 동단 진황도시 일대이라는 것이 사학계의 일반적인 논리임에도 드라마의 자막에 나오는 요서가 산동성이라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리고 그 당시 민간의 작은 배로 과연 황해 횡단이 가능했을까? 현대의 수만 톤급의 선박으로도 황해횡단 시 날씨가 궂으면 승객들이 배멀미를 심하게 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당시 나무로 만든 돛단배로 노를 저어 황해를 그렇게 쉽게 횡단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근초고왕의 영토라는 현 사학계의 이론

 

그렇다면 드라마 근초고왕에 나오는 원래 요서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백제인들이 수시로 건넜던 바다는 과연 어디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근초고왕이 군(郡:식민지)으로 삼았다는 요서(遼西)와 진평(晋平)은 예전에 바다로 표현했던 황하의 북쪽 산서성 최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근초고왕이 그토록 그 땅을 수복하려 했던 이유는 그곳은 바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이 나라를 세운 시국처인 대방고지(帶方故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사서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幽州)에는 7개 군이 속해 있다. 요동(遼東), 요서(遼西), 북평(北平), 상곡(上谷), 어양(漁陽), 낙랑(樂浪), 현토(玄免)가 그것이다. 이 유주라는 지역은 산서성 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를 말함이다. 그 결정적인 유적이 바로 요서군을 상징하는 백이.숙제의 무덤인 것이다. 이 무덤이 2년 전 필자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그 일대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이며, 고구려의 영토였고 산서성 남부가 백제의 초기 도읍지라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청나라 때 만든 지도인 대청광여도에 그려진 요서군의 상징인 백이.숙제의 묘는 산서성 황하 굴곡지점에 있다.

    산서성 최남부 황하 굴곡지점에서 발견된 고죽국 백이.숙제의 묘는 요서군의 상징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

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上谷郡 상곡군) 秦置。莽曰朔调。属幽州。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泉上,莽曰塞泉。潘,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雊瞀,夷舆,莽曰朔调亭。宁,西部都尉治。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 (대수는 서쪽으로 대방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543;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즉 유주 지역 안인 산서성 남부에 고죽성이 있는 영지현이 속해 있는 요서군과 탁록현이 속해있는 상곡군과 대방현이 속해있는 낙랑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유주를 지도에 그리면 아래와 같다.

 

                           <한서지리지>에 언급된 유주에 속한 7개 군을 지도에 표시했다.

 

또한 최근 중국 산서성 운성시 지방정부의 관보에 의하면,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싸운 탁록(涿鹿)의 위치가 소금 호수인 해지(解池: 일명 鹽池) 일대라고 자기네 스스로 밝히고 있다. 또한 운성시 안화현 낙안진 대화촌의 정식명칭을 치우촌(蚩尤村)으로 변경했다고 보도되었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탁록현은 상곡군에 속한 1개 현이다. 따라서 상곡군은 운성시 염지 일대이며 그곳이 바로 유주의 일부였던 것이다.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위해 산서성 최남부에 있어야 할 상곡(上谷)과 탁록(涿鹿)이라는 지명을 현재 북경 근처 하북성으로 옮겨 놓았으며, 대방(帶方)이라는 지명을 하북성 남쪽으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지명을 밝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명인 노룡현(盧龍縣: 백이.숙제의 무덤이 있는 곳)과 갈석산을 하북성 동쪽 끝인 진황도시로 지명 이동시켰던 것이다.

 

              산서성 운성시 지방정부에서 발표한 내용 "탁록은 운성시에 있었다"

            산서성 남부 운성시 염지 근처에 있는 치우촌 유적.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싸운 탁록이 바로 이 부근이다.

 

치우천왕과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이 있던 핵심강역은 바로 산서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강역은 산서성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으로는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티베트, 중앙아시아, 터어키까지 알타이어계의 영토 모두이며 이곳에 현재 살고 있는 민족 모두가 단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중국의 영토는 섬서성과 하남성 뿐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열쇄가 바로 바로 요서군의 상징인 고죽국 백이.숙제의 묘인 것이다.

 

요서군은 단군조선의 남쪽 제후국인 고죽국의 땅이었으며, 백제의 시국처(始國處)였다가 고구려 대무신제와 태조대제 때 요서에 10성을 쌓으면서 고구려로 편입되었던 것을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이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면서 수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광개토태왕에 의해 산서성 남부인 요서의 땅은 고구려로 회복된다.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 바로 아래 광개토태왕 비문 1면 7행에 있는 염수를 정벌했다는 기록인 것이다. 이후 요서의 땅은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땅이었다.

 

광대토태왕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염수(鹽水)는 바로 산서성 남부 운성에 있는 소금호수인 염지(鹽池: 일명 解地)를 말하는 것이며, 이곳은 바로 치우천왕이 황제헌원을 굴복시킨 탁록 근처를 말함이다. 즉 상곡군의 땅인 것이다. 아래 비문의 비려(碑麗)는 중국 사사에 나오는 비여(肥如)와 같은 곳으로 노룡(盧龍) 즉 백이.숙제의 무덤이 있는 요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중국의 자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면 7행)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游觀土境, 田獵而還.

영락 5년은 을미년으로 왕은 비려가 고구려인들을 돌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부락 6~7백명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동래#성,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사냥준비를 시켰다. 순유와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있는 염지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장면. 이 일대가 상곡군의 탁록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드라마 ‘근초고왕’을 제작했으면 좋으련만, KBS가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이 이병도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학계의 이론에 입각하여 드라마를 만들다보니 요서가 산동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전 국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방영된 것이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볼 때마다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과 관영 방송매체들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곤 한다.

 

아! 언제쯤 우리 역사가 바로 잡힐 수 있을지.....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로 제대로 못 찾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일본인의 개가 되어 이 나라의 역사를 도륙낸 이병도의 후학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역사학계를 맡겼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날조 왜곡된 우리의 역사가 아직도 교과서에 실려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성훈역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