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역사

[스크랩] 독일과 소련의 국운을 건 인류역사상 최대의 전투 - 쿠르스크 전투

왕풍뎅이 2011. 6. 29. 23:29

그냥 쉽게 보실수 있게 쓴 글입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찾으시는분은 제대로 찾아서 보시기를...

 

 

 

 

 

시타델작전의 개요

 

1943년 초애 벌어진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대참패와 화성작전의 실패로 소련은 남은 군을 재편성할 시간이 필요해졌고

독일 역시 스탈린그라드의 패배이후 한숨을 돌릴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침 하르코프 공방전의 부산물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독일 남부집단군의 진격으로 인해 전선사이에 회랑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일 입장에서 키예프 포위전을 회상하게 하는 먹음직한 먹이감이었습니다

물론 좋은 쪽 뿐만 아니라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미영연합군에게 계속해서 밀리는 상황에 처하고'

영국과 캐나다군의 디에프 기습상륙으로(하지만 상륙했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개발살남..)

독일은 뒷통수가 근질근질해지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죠

그래서 히틀러와 독일군부는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이 쿠르스크회랑의 소련군을 포위섬멸하고 소련군에게 대타격을 입힐수 있는 대규모 공세로

소련을 떡실신시켜 당분간 버로우타게 만든후 군을 돌려 서방연합군을 상대한다는 "시타델(성채)작전"이었죠 

 

만슈타인 원수 : 아우~칠거면 아예 로스께 애들이 정비 다 되기 전에 얼른 쳐야한다니깐...

말을 안들어....

 

이런 계획이 세워지자 만슈타인 원수는 우리가 먼저 공세를 걸기보다는

적이 공세를 취해올때 방어한후 역습하자고 주장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눈빛에 뒤통수가 근질근질한걸 느끼던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주장을 묵살합니다....

공세를 취하는걸로 결정되자 만슈타인 원수는 아군의 기본적인 준비가 끝나고 소련군의 방어가 강화되기 전인

5월 3일에 즉시 공세를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히틀러와 할더장군은 

"일단 개발중인 신형전차(5호전차 판터)가 나오는걸 기다려서 쳐들어가자"라고 주장했고

결국 작전개시일은 6월 12일로 미뤄집니다

그리고 얼마후인 5월 중순 북아프리카전선의 독일군이 보급부족으로 패퇴하자,

히틀러는 보급문제를 완전히 해결한후 공세를 벌이기 위해 다시 작전을 7월 5일로 연기합니다  

 

스탈린 : 파시스트 종간나 새끼들 당장 쓸어버리라우!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 대원수각하 살짝 돌으셧음?

 

하지만 이런 독일군의 공세는 소련 입장에서도 이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언제 공격해오느냐였을 뿐이죠

사실 스탈린은 아예 먼저 선공을 걸기를 바랬지만 총사령관 주코프와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가 극구 만류합니다.

하르코프의 패배이후 아직 정비가 안된상태에서 선공을 걸었다 다시 패하면 걷잡을수 없다는 거였죠.

결국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방어후 역습으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소련은 쿠르스크에 말그대로 우주방어급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합니다.

최대한 독일군의 피해를 강요한후 피해가 누적되고 지친 독일군을 몰아치겠다는 계획이었죠

30만의 민간인을 동원 쿠르스크에는 무려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거대한 6중의 방어선이 구축됩니다.

대전차포와 기관총진지등이 조합된 3천마일에 달하는 참호망이 구축되고 40만 발의 지뢰가 깔렸으며

수천km의 철조망과 수천,수만의 대전차호와 대전차 장애물

그리고 전차의 발을 묶기위한 피아노선이 공격예상루트에 도배되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를 다룬 러시아 프로그램

 

처음 소련측은 자신들이 방어선을 완성하기 전인 5월로 독일군의 침공을 예상했으며 

방어진지를 계속 만들어 가면서도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중압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비상상태로 5월이 지나가자 장병들의 중압감과 긴장은 극에 달해서

6월이 되자 탈영자들까지 상당수 나올 정도 였습니다.

그러던 6월 마지막주 7월 5일에 공세가 시작될거라는 정보가 첩보망을 통해 입수됩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독일의 첩보망측이 흘린 역공작에 걸려 삽질을 여러번 해본 소련은 긴가민가 하고 있었죠

 

그렇게 드디어 7월에 접어듭니다...

7월 4일 항복한 한 독일군 병사가 5일을 기해 공세가 시작될거라는 정보를 전하고

7월 5일 새벽2시 소련군진지쪽 지뢰지대를 개척하다 포로로 잡힌 독일군 공병이

1시간후 공세가 시작될거라고 실토하면서 

소련군은 드디어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될때가 됐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주코프 원수 : 자고로 싸움은 선빵날린 놈이 먹고 들어가는 법!!!

 

 

보고는 즉시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원수에게 올라갔고 주코프는 기다릴것 없이 선제공격을 명령  

시타델 작전개시 30분전인 7월 5일 새벽 2시 30분을 기해 소련군 포병대는 독일군 진영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독일군 진영을 향해  불을 뿜는 카츄샤 로켓

 

독일군은 작전개시 직전 도리어 선공을 당하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만

포격에 큰 피해를 입은건 아니라 그대로 작전을 속행하고

오전 4시 30분 쿠르스크북부의 공략을 맡은 발터 모델원수가 이끄는 독일 9군이 정면의 소련 13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동부전선의 운명을 가른 인류 최대의 전투인 쿠르스크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쿠르스크 일대에 집결한 양측의 전력을 비교해 볼까요?

 

   독일  소련(역습을 맡은 스텝전선군 포함)
 병력  90만  170만
 기갑(전차+자주포)  2700대  3600대
 항공기(전투기+폭격기+지상공격기)  2000대  3100대 
 각종 화포  10000문  19000문+카추샤로켓 920문

 

 

 

 

 

 

 

 

독일군은 중앙집단군이 쿠르스크 북부공략을 맞고 남부집단군이 남쪽의 공략을 맡아서

쿠르스크회랑을 양익포위하려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지금까지 해온 방어준비가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 : 화성작전의 악몽을 다시 재현시켜주마 ㅋㅋㅋ...

하지만 내 전문은 방어잖아...안될꺼야...아마....

 

9군의 지휘를 맡은 발터 모델 원수는 만슈타인이 남부집단군을 이끌고 하르코프에서 승리할때

화성작전에 의거하여 중부집단군에 쳐들어온 소련군을 르제프에서 개관광보낸 장군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방어선이 상당하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고

6항공군에 지원을 요청하여 공군의 힘을 빌어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습니다만...

Ju-87슈투카 폭격기들이 날아와 공중지원을 해주고 돌아가려는 순간.

소련군 전투기 400여대가 날아왔고 독일공군의 호위기들이 이에 맞서 사상 최대규모의 공중전이 하늘에서는 벌어지는데

공중전끝에 숫적 열세에 몰린 독일공군이 제공권 확보에 실패하면서 

결국 지상에서는 선봉을 맡은 23,47기갑군단은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기위해 몸으로 때우게 되었습니다

 

지상과 공중 모두에서 독소 양국군의 사투가 벌어졌다

 

중앙돌파를 맡은 23,47 기갑군단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결국 발이 묶이게 되지만

양익의 41,46기갑군단은 양익을 돌파하는데 성공

41기갑군단은 곧이어 지원된 소련군 사단에 의해 차단당하지만 46 기갑군단은 지원된  소련군2개사단마저 돌파하고

포니리를 항해 진공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양익이 돌파당하면서 소련군의 1차방어선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중부집단군은 포니리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지만..

문제는 겨우 6.5km 진격한데 불과했고 이 1단계 방어선을 걷어내는데 주공을 맡은 전력의 20%가 손실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음날인 7월 6일 새벽 소련군은 대규모의 반격을 가해 왔으나 모델은 훌륭하게 반격에 성공하여

소련군은 300대의 전차를 상실한체 퇴각하고

그 여세를 몰아 모델은 2차방어선 공략에 나서지만 막대한 피해만 입고 공략에 실패합니다.

작전 기일을 맞추지 못할 상황에 다다르자 7월7일 모델은 전력을 총동원하여 2차 방어선 공격에 나섭니다

반경 10km의 지역에 독소 양군 40만이 몰려들어 처절한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2차방어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다음 날 역시 총공격을 개시하지만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는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증원으로

어떻게든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합니다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계속되는 소련의 끝없는 증원에 결국 모델은 GG를 치고 공세를 포기하기에 이르죠

 

  격파된 판터

 

하지만 독일군 사령부에서는 계속 공세를 지속하기를 요구했고 어쩔수 없이 모델은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병력을 꼴아박습니다..

결국 7월 10일에 이르자 모델은

"소련군 방어선 뚫는건 불가능요...하려면 할수는 있겠지만 그저 소모전이 될 뿐임"

이라고 보고하고 위에서 뭐라고 지룰하던간에 공세를 완전히 포기한체 부하들을 휴식하게 합니다..

겨우 5일만에 중앙집단군의 공세는 겨우 15km 전진하고 돈좌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한편 만슈타인원수의 지휘하에 남부에서 공세를 시작한 남부집단군은 그에 비해 잘해나가는 편이었습니다.

헤르만 호트가 이끄는 4기갑군은 니콜라이 바투틴이 이끄는 벨로네즈방면군을 격파하며 2일만에 30km이상 진격하는데 성공합니다

 

벨로네즈 방면군 사령관 니콜라이 바투틴 : 아.....앙대....나의 소중한 T-34짱이....

나의 순결한 방어선이.....ㅠㅠ

 

 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 저런...X덕 놈을 봤나.......

 

사실 남부집단군의 선전은 어느정도 예상된 것이기도 했는데

애초에 기갑부대의 숫자도 중앙집단군보다 많았고

게다가 국방군의 최고 정예인 그로스 도이칠란드 사단이나

SS의 최정예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같은 최정예기갑사단이 9개나 4기갑군에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지휘관도 신중한 방어위주의 전략을 구사하던 모델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공격적인 호트였구요

 

 

초기형인 판터D형은 엔진과 트랜스미션의 문제로 인해 툭하면 퍼지기 쉽상이었다

물론 후기생산형에서는 해결되었다  

 

쌍두의 뱀과 같이 진격해나가던 48기갑군단과 SS2기갑군단이었지만 그들의 진격도 거기까지....

48기갑군단의 새로 수령한 판터 초기형들은 이런 저런 트러블때문에 퍼지기 쉽상이었고

곧 지원나온 소련의 67근위소총수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저항으로 진격에 애로사항이 꽃피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독일공군이 제공권을 정악하지 못하다보니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소련 폭격기들에게 폭탄세례를 받아야만 했죠..

3기갑사단의 분전으로 겨우 48기갑군단은 1차 방어선을 뚫기는 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피해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한편 파울 하우서가 지휘하는 SS2기갑군단은 남부전선의 우익을 맡아서 소련 6근위군을 떡실신시키며 쾌진격하여

남부전선에서 다시 작은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4기갑군 본대와 이어지면 남부전선에서도 작은 포위망이 만들어지고 소련군의 남부전선이 전면붕괴될 상황이었죠

7월 7일 소련은 급히 1전차군을 투입하여 그들의 진격을 차단하려 하지만

패배하고 7월 10일에는 프숄숲까지 내주지만

이미 전력이 크게 줄어든 SS 2기갑군단은 더이상 진격하기엔 무리인 상황에 다달아 있었습니다. 

 

 

공세가 돈좌되자 호트는 공세의 방향을 북동쪽으로 바꾸고

그리고 SS 2기갑군단을 철도교통의 요지인 포로호로프카로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미 그곳으로 향하는 소련군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소장이 지휘하는 5근위전차군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7월 6일 그에게 생일축하 전화를 건김에(?) 프로호로프카로의 출동을 명한 상황이었죠

 

스탈린 : 동무 생일을 축하하오! 그런 김에 프로호로프카로 가서 파시스트 돼지들을 족치시오

아! 생일빵은 나 대신 파시스트 돼지들이 해 줄거요!

 

주코프 원수 : 아 파벨! 나도 해줄 충고가 있네

우리 T-34는 발빠른거 빼고는 독일전차에 상대가 안되니까

그냥 멀리서 포쏘고 이럴 생각 하지 말고 "전차의 백병전"을 치르도록 하게

아무리 티거,판터라도 영거리 사격에 버틸순 없겠지!

 

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 ㅅㅂㄹㄷ...

말이야 쉽지....니가 직접해봐라....

 

1943년 7월 12일 아침

프로호로프카에서 SS2기갑군단소속 전차 200~250대 가량과 소련 5근위전차군의 전차 630대 가량이 마주칩니다.

양 전차대가 격돌하기전 상공에서는 양군의 폭격기와 전투기 수백대가 맞붙었고 이는 역사상 최대의 단일 항공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공중전이 계속 되는 가운데 오전 8시 30분 양군의 전차대는 격돌합니다

이 역시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남아있죠

로트미스트로프는 주코프의 지시대로 전차대에 돌격을 지시하고

독일과 소련의 1000여대에 달하는 전차대는 수평방킬로미터의 좁은 지형에서  뒤엉켜 말그대로 전차의 백병전을 벌입니다

전투는 매우 치열하여 양군 전차간의 영거리 포격이 오가고 양군의 보병들 역시 가세하였으며 

전차가 격파된 전차병들은 수류탄을 들고 뛰어내려 적전차에게 달려드는등 대혼전의 양상이었습니다 

 

 

 

 

전투초반 우세를 점한쪽은 숫적으로 앞서는 소련군이었습니다.

9시경 LSSAH사단의 사단사령부인근까지 밀고 들어왔으나 전차엽병대대에 의해 격퇴되는 일도 있었고

10시경에는 독일군 전선의 한축을 허물고 150mm곡사포진지까지 돌입에 성공해  포병대를 도륙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오후들어 점점 독일군이 승세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전투가 저녁에 접어들자 소련군은 퇴각하기 시작합니다

분노한 스탈린은 로트미스트로프 소장에게 전차를 땅에 뭍어 토치카로나 쓰라는 지시를 내리게되고

멀쩡한 전차를 추스려 보니 전투전의 630대에 달했던 전차중 멀쩡한 전차는 50대로 줄어있었습니다.. 

이날 전투로 독일군 전차 60대가 파괴되었으며 소련군은 600여대 가까이 격파되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격파된 T-34/76 전차

 

독일군은 전차전에서 대승을 하기는 했으나 재정비가 필요해졌으므로 더이상 진격할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소련군은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SS2기갑군단의 더이상의 진격을 막는다는 전략적 목표는 달성함으로서

독일과 소련은 서로 반쪽의 성공을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날인 13일에도 남부전선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으나 서로 맥빠진 전투에 가까웠고

바투틴과 바실레프스키의 뛰어난 방어로 독일은 별다른 소득을 건지지 못한체 13일의 전투도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 10일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히틀러는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13일 공식적으로 시타델 작전은 취소 되었으며  SS2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또한 다른 각 부대에도 공세전의 위치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이때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쿠르스크에서 독일군의 공세와 소련군의 반격방향

 

 

바로 돌출부 자체를 잘라내버린다는 쿠투조프-루미안체프작전이었죠

동부에만 신경을 쓸수 없게된 독일군은 결국 하르코프와 벨로그드를 빼앗기고 전선축소작업에 들어갑니다.,

 

쿠르스크전투로 양군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소련이 독일에 비해 최소 3배이상의 큰 피해를 입었죠

하지만 소련은 그것을 보충할 능력이 있었으나 독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독일군의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사라지게 됩니다.

 

 

아래는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사진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꼬마니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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