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이동중
첫발 피격
두번째
경호원 접근
- The President John F. Kennedy Assassination -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낮 12시 30분. 미국 텍사스 주 댈라스시. 휴스턴가에서 운명의 좌회전을 한 케네디 대통령의 오픈카가 델리 광장으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었다.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댈라스는 원래 극우 단체나 반공 그룹의 반 케네디 분위기가 강한 곳이어서 측근들의 우려가 많았으나 대통령은 시민들의 따뜻한 환대에 한껏 기분이 좋아있었다. 순간 마른 총성이 세 발 광장에 울려퍼졌다. 두번째 총성 뒤 대통령이 머리를 떨구었다.
오픈카가 댈라스 파클랜드 병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가 6초. 병원에 도착하기 전 대통령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당시 나이 46세.
뉴 프런티어 정신을 제창, 미국인들에게 전후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며 패기만만하게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만이었다.
케네디의 암살사건 발생 약 2시간 후 현장 부근에서 오즈월드라는 사람이 용의자로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틀 후 오즈월드는 구치소로 수감되기 직전 갑자기 댈러스 경찰서의 지하실에서 나이트클럽의 경영자이자 연방수사국(FBI)의 정보원인 J.루비에게 그도 사살된다.
그리고 오즈월드가 사망한지 얼마지나고, 오즈월드를 죽인 J.루비도 재판을 받고난 후 오즈왈드가 이틀동안 갇혀있었던 독방에서 의문의 의사가 놓아준 ‘감기주사’를 맞은 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사망원인은 암이었다 그렇게 J.루비까지 의문사를 당함으로써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련된 사람들은 더 이상 없었다. 더이상 사건에 개입된 배후를 알아낼수도 없었다.
그리고 JFK가 서거후, 린던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미 정부는
대법원장 알 워렌을 위원장으로 하는 '워렌위원회'라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10개월 후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즈월드의 단독범행이며, 배후에 국내외의 어느 기관도 관련된 사실이 없다. 3발의 탄환이 발사되었는데, 그 중에서 2발이 대통령에게 명중되었다. 1발은 대통령의 등 윗부분에서 목을 관통하였고, 1발은 텍사스 주지사 코널리의 허리에서 오른쪽 손목을 뚫고 대통령의 왼쪽 대퇴부에 도달하였다."
워렌 위원회는 진상조사에서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임을 최종결론을 내리고 종결하게 된다.
그런데 워렌 위원회의 결론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당시 사건에 의문을 품은 짐 개리슨 지방 검사의 조사에 의하면
오스왈드는 케네디의 뒤쪽에서 저격했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과 사용된 총에 대한 모든 물적 증거로 볼 때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당시 총포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명사수라도 칼카노 총(오스왈드가 사용했다는 총)을 이용해 그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아주 짧은 시간안에 움직이는 표적에 3발 내지 4발을 명중시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즉 케네디는 차 앞쪽에서 쏜 총탄에 맞았으며,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니고 2명 이상의 사람들에게서 저격당하였다는 것.
그리고 사건 당시 현장을 포착한 유명한 비디오 필름(재봉사 더플씨 촬영)은 대통령이 흉탄을 맞는 순간 머리가 뒤로 젖혀졌음을 보여줬다.
거기다 또 의문점은 댈라스에서 시신을 담았던 관과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의 관이 달랐다는 관계자들의 증언까지 나왔다.
이 워렌보고서가 발표되고 여러가지의 새로운 의혹에 쌓이자 1976년 하원에 암살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워렌보고서의 재검토가 행해졌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점들이 의혹으로 남았다.
사건의 모든것이 다 의문 투성이였다.
사건 당일 오즈월드 부인의 차고에서 2장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2장 모두에서 오즈월드가 권총을 들고, 왼손에는 사회주의 기관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피격되는 순간 몸을 뒤로 젖혔는가 앞으로 굽혔는가 단독범인지 복수범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그 순간을 찍은 8mm 필름의 일련번호가 거꾸로 되어 단독범인 것처럼 조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댈러스 경찰서에서 오즈월드를 12시간이나 심문하면서 전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오즈월드가 교과서 창고 건물에서 옮긴 한대의 차량을 접수도 검사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사건 직후 오즈월드가 저격장소로 사용하였다는 교과서 창고 뒤뜰에서 3명의 남자가 체포되었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일체 남아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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