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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스터리한 부여와 은나라의 관계

왕풍뎅이 2011. 3. 27. 00:45

 

한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소홀히 대접받는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바로 부여다.

부여가 우리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고구려, 백제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부여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백제,신라에 비교하면 상당히 소략하다. 그렇기에 학계에 주목을 덜 받는것 같다.

하지만 부여야 말로 고구려, 백제의 뿌리 나아가 예맥족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라를 주목해야 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피터지게 싸운 것... 그 이유는 바로 누가 부여의 정통을 이어받았냐는 것으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에 있어 부여는 자신들의 뿌리였다. 백제는 부여의 시조 동명을 제사지내는 동명묘를 건립했으며, 고구려는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할 정도로 이 두 나라는 자국이 부여를 계승했다는 뿌리의식이 강했다.

 

부여... 부여의 역사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여는 『사기』, 『산해경』등에 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이른 시기에 활동했다. 학자들은 부여가 BC 4세기에 건국되었다고 본다. 부여가 멸망한 해는 서기 494년이므로 거의 800년을 이어온 장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였다.

 

부여는 서기 3세기경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의 의려왕이 자살하고, 그 주민이 모용선비의 포로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침공으로 부여의 현왕이 포로로 잡히고 부여주민 5만이 다시 전연의 포로가 되었을 정도로 쇠약해졌지만, 한 때 북방의 강국 고구려에 맞서 끊임없이 고구려를 괴롭히고, 중국 한나라로부터 옥갑을 조공받았을 뿐 아니라, 동쪽의 읍루를 속국으로 거느리는 등 대국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

 

부여의 강역은 대체로 남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와 북만주의 장광재령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선비와 서요하 유역에 경계하고, 북으로는 흑룡강에서 끝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부여의 중심지역은 오늘날의 장춘, 농안, 길림 등 광할한 평원이 펼쳐진 삼각지대였다.

 

 

 

부여는 비록 그 기록이 빈약하지만, 그들이 남긴 유물로 당시 부여가 어떠한 나라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송화강 유역 용담산 줄기 남성자라는 곳에서 원형의 토성이 발굴되었는데 중국 고고학자 무국훈은 「부여왕성신고」에 이 토성이 '전기 부여왕성'이라하였다. 참고로 중국 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의 "성책을 만들었는데 모두 원형이다"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송화강 유역의 용담산, 동단산, 서단산, 모아산, 포대산 등지에는 부여 유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요녕성 서풍현 서자구 유적에는 63기의 장방형 토광 목곽묘가 발굴되었는데, 이들 무덤에는 순마(殉馬)를 비롯하여 무기, 마구, 복식, 기물, 공구, 장식품 등 2,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는 금동패식, 철제무기, 금·은제 귀고리, 옥제 목걸이, 청동거울 등이 있다.

 

종래에는 이 서자구유적을 BC150~AD50년 사이 약 200년간에 걸친 흉노문화라 보았지만, 요녕성박물관 전운은 서자구 유적은 흉노도 선비도 아닌 부여 초기 유적이라 하였고, 길림성 고고연구소의 이전복 역시 부여의 문화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부여 중기 대표적인 유적으로 길림성 유수현 노하심 유적이 있다. 1981~198년 2차례에 걸쳐 발굴된 이 유적의 맨 아래층에서 송화강 유역에서 유행한 청동기 문화인 선(先) 부여문화 단계의 서단산 문화시기 유적이 발견되었고, 그 위층인 중층 유적에서는 부여 시기 무덤인 토광목곽묘 129기가 발견되었다.

 

노하심 유적에 대해 발굴 보고자는 서한 말기 ~ 동한초기의 선비유적이라 했지만, 류경문은 노하심 유적의 출토유물의 문화내용과 무덤의 지리적 위치 등으로 미루어 노하심 유적은 부여문화라 주장하였다.

 

서자구 유적과 노하심 유적에는 많은 양의 금 귀고리가 출토되었다. 부여문화의 귀고리는 3종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고리 모양의 귀고리

걸개와 드리개 장식으로 된 귀고리

걸개, 중간장식, 드리개 3부분으로 구성된 귀고리

 

부여의 유적에는 유달리 금 관련 제품이 많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부여는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以金銀飾帽)

 

『위서』동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온다(黃金出自夫餘)

 

이 같은 기록을 통해 부여에서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는 황금의 나라였다. 황금의 산지인 부여는 금 관련 제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중국 사서에는 부여의 관식이나 귀고리가 화려한 황금으로 장식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황금으로 장식품을 만들정도로 부여는 수준높은 문화를 향유하였다.

 

아래의 그림들을 보면 부여의 황금문화가 얼마나 화려한지 알려준다.

 

 

 




 

 

 

이토록 화려한 문화를 남긴 부여였지만, 기록이 부족한 탓에 부여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은 아쉬울 따름이다.

 

고등학교 국사시간 때 부여는 우제점을 쳤다고 달달 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여의 제사문화가 은나라의 것과 거의 똑같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

 

위 기사는 군사활동이 있을 때마다 부여에서는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의 굽뼈로 점을 쳐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부여의 점복기사는 이것 말고 또 있다. 위나라 어환이 편찬한 위략에 실려있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전하지 않고 그 일문(佚文)이 당나라 초기 장초금이 편찬한 『한원』「번이부」 부여조에 보인다.

 

발굽으로 점을 쳐서 그 조짐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

『한원』「번이부」 부여조

 

고대 중국의 상나라(은나라)는 부여처럼 우제점으로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부여와 은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신석기시대 발해연안에서 발생한 갑골문화가 상인(商人)들의 선조들이 황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함으로써 상나라에 갑골문화가 성행했다고 보고 있다.

 

갑골은 발해연안에 분포하여 생활하던 동이족들이 사용하던 생활습관인데 이 동이족들이 황하 하류로 남하하여 상왕조를 건설하고 갑골문화를 발전시켰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은(상)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또 하나의 근거는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에 부여에서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낸다고 한 문구를 들 수 있다. 은나라 정월, 이는 은나라 역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으로, 부여에서는 은대 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음력 2월)에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부여는 흰 색을 숭상했다.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 나라의 옷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천으로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은 도포를 만들어 입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

 

그런데 부여의 흰색 숭상과 관련하여 『예기』는 의미심장한 기록을 전한다.

 

하나라 시기에는 흑색을 숭상하여 상사(喪事)가 있을 때 황혼에 입렴(入斂)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 흑마를 타며, 제사시에는 흑색의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 시기에는 백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 정오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 백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백색을 바친다. 주나라 시기에는 적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 일출시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 적마를 타며, 희생물은 적색을 바친다.

『예기』「단궁상」

 

예기의 이 기록은 하나라는 흑색을, 은나라는 백색을,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다고 한 내용이다. 은나라가 흰색을 숭상한 것과 부여가 흰색을 숭상한 것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부여와 은의 상관관계에 대해 또다른 증거로 이형구 교수는 부여의 순장제도를 들고있다.

 

사람을 죽여 순장하였는데 많을 때에는 백여 명이나 된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조

 

부여에서는 많을 경우 백 수십명을 순장했는데, 은나라 역시 다수의 사람들을 순장했다. 1001호 대묘에서는 360명의 순인이 발견되었다. 동양 고대사회에서 순장제도는 주로 동북아시아의 동이족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중국의 황전악은 "사람을 죽여서 제사에 희생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하는 것은 야만적인 습속으로 이와 같은 습속은 은왕국의 통치세력권에서 성행했을 뿐 아니라 은의 동방, 회이와 동이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였다"고 하였다. 황전악은 동이문화권에서는 은나라처럼 순장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요동반도 강상, 누상무덤에 보이는 백여명의 순장 흔적(고조선), 고구려, 신라에서 엿볼 수 있다.

 

부여의 점복신앙,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 흰색 숭상, 순장습관 등을 근거로 이형구 교수는 부여, 은나라, 고구려의 관습들이 상당히 일치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순장제도와 관련해서, 순장문화가 동이족 문화에만 보인다고 하더라도, 중국 주나라 시기에 순장의 흔적이 보이는 것을 볼 때 은나라에 순장과 부여의 순장을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위의 여러 정황을 볼 때 부여와 은나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은 분명해보인다.

 

황금의 나라 부여, 우리는 이 나라의 실체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부여와 은나라의 관계, 부여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베일에 가려진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어느 정도 풀리지 않을까?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호루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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