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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 2007. 09. 29 [ '백제를 멸하리라'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백제는 700여 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역사에 패자가 있으면 승자가 있는 법
그 해 8월
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입성한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김춘추의 오랜 열망과 복수가 이루어진 순간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 시키며 드디어 3국 시대를 마감하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이 중심에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있었다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력으로 당나라를 끌여들어 통일의 대업을 이룩 할 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외세 의존의 역사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춘추의 외교는 과연 어떤 것 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토록 외교에 집착했던 것일까?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김춘추에 대한 첫 기록은 대야성이라는 지명과 함께 나온다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도독부를 설치 이 지역을 관할했다
천혜의 자연을 이용한 대야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642년 의자왕은 대야성을 공격했다 당시 대야성 전투를 기록한 비석이 지금도 합천에 남아 있다 백제의 침공에 맞써 싸웠던 신라장군 죽죽의 비석이다
그런데 품석이라는 인물은 백제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뚜렷하다
품석은 당시 대야성의 도독 즉 성주였다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고 부인과 함께 백제군의 포로가 되었다 (못난놈..)
품석은 왜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까?
이는 품석 자신이 자초한 일 이었다 품석은 자신의 부하인 검일 장군의 아내를 탐내 빼앗아버렸다 (못난놈...ㄱ-)
백제가 쳐들어오자 검일은 그들과 내통,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이에 품석은 항복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품석과 그의 아내가 김춘추의 사위와 딸 이라는 점 이었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신라 화랑들이 그들의 맹세를 새긴 임신서기석
그런데 김춘추의 사위 품석은 이런 화랑 정신을 외면한 채 백제에 항복하고 만 것이다 대야성함락의 책임과 비난이 김춘추에게 쏟아졌다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춘추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다
김춘추는 이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결단했다 그는 당시 왕이던 선덕여왕을 만났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고구려 행 이었다
대야성에서 딸과 사위가 죽고 그 시신까지 빼앗긴 김춘추
개인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눈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로 큰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고구려 행 김춘추의 정치적 결단이자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김춘추 시대,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끊임없이 신라를 침범해왔다
한강을 둘러싼 쟁탈전도 치열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두고 고구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강은 신라에게 생명선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강유역의 당항성은 신라가 중국과 교통 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성을 지키기 위해 신라는 군사력을 집중했다
백제와 고구려는 연합하여 바로 이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다 신라의 위기였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김춘추는 적대국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떠나기 전,
김춘추는 김유신과 만났다
" 나는 공과 일심동체요 지금 내가 만일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
" 공이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말 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 두 왕의 군정을 짓밟을 것이오 "
" 내 생각에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그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오 "
그것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기세등등했다
한편 당나라는 고구려와 끊임없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춘추가 고구려행을 결심한 것은 당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행보였다 고구려와의 외교에 실패해도 차후 당 태종을 압박 할 수 있는 정보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고구려로 간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물 됨됨이를 파악하려 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김춘추는 마침내 고구려 보장왕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고구려의 군사력을 요청했다
" 백제가 무도하여 신라 강역을 번번이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구려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
" 지금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마목현과 죽령은 원래 우리 고구려 땅이다 그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어줄 수 있느니라"
보장왕은 군사동맹 댓가로 영토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 곳은 신라로써는 결코 양보 할 수 없는 곳 바로 한강 상류지역이었다
" 신은 신라 왕의 명을 받들어 원병을 청하러 왔거늘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달라 하십니까 "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 미리 고구려관료 선도해를 매수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치밀함이다
김춘추를 찾은 선도해는 토끼와 거북 설화를 들려주었다 당장의 위기 극복을 위해 거짓 약속이라도 하라는 우회적인 충고였다
한편 신라에 남아있던 김유신도 행동에 들어갔다 김춘추가 억류되자 별동대 3천을 고구려 국경에 집결시켰다 (스케일 쩌는 우정)
"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고구려에 붙들려 있는데 어찌 두렵다하여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김춘추는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고구려행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 할 점은 대야성이 함락 당하고 신라가 국가적인 위험에 처했을 때 선덕여왕과 진골귀족들은 걱정만 할 뿐 누구 하나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바로 이 때 김춘추가 움직인 것이다
일본 서기에도 김춘추에 대한 짧은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에 다녀온 김춘추는 또 다시 왜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왜는 백제계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일본행 역시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춘추의 열망, 집착, 오기 ㄷㄷㄷ)
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자주 불러 축국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김유신 집을 지나들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눈이 맞았고 급기야 문희는 혼전임신을 했다 이를 안 김유신은 부도덕한 여동생을 태워죽이겠다며 마당에 불을 피웠다
때마침 남산에 오른 선덕여왕이 이 연기를 보고 사연을 물었다 김춘추가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이를 안 선덕 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와의 결혼을 명한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김춘추의 살람됨을 알아본 김유신의 계책이었다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유신랑!!!)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 그는 법흥왕 때에 금관가야를 신라에 바치고 귀순했다 바로 가야의 이 마지막 왕이 김유신의 증조부다
신라로 귀순한 김유신 가문은 숱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신라 주류는 정통 진골귀족들 김유신 가문은 여전히 비주류였다
김춘추 가문 역시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4년만에 귀족들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 그는 김춘추의 할아버지다 김춘추는 폐위된 왕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이는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에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신분적 정치적 한계를 지녔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혼맥을 형성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런 관계를 유지한 김춘추와 김유신 앞에는 공통의 과제가 있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선덕여왕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신라 왕권은 불안정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의 왕권을 지키는데 주력했다
당태종 역시 선덕여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황제의 일가를 신라의 왕으로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런 배경으로 진골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덕여왕 16년 상대등 비담(사심 가득담아 별표 일억개)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이 이의 제압에 나섰다
(드라마 "선덕여왕" , 김남길의 폭풍연기가 돋보이는 '사망씬' 참고하시긔)
상대등 비담을 비롯 반란세력은 모두 처형당했다 구 귀족세력인 진골들도 상당수 제거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신라의 신흥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하지만 아직 남은 과제가 있었다 반드시 멸망시키리라 굳게 다짐한 백제는 건재한 채로 끊임없이 신라의 국경을 침범해오고 있었다
이에 당나라와의 외교에 나선 김춘추
그러나 고구려와 끊임없이 충돌하던 당나라에게 한반도 동쪽의 작은나라 신라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나라에 도착한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당태종 스스로도 김춘추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후하게 대했다
이런 환대는 배경이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수차례 전투를 치룬 상태였다 특히 태종 자신이 출정했던 안시성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전을 당한 직후였다
이제 당나라는 신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의 입장에서 고구려 분산을 위해서라도 신라가 필요했다
태종의 환대에는 이런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났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춘추는 의외의 발언을 한다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군사동맹 이라는 핵심내용 대신 유학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의 전략이었다
당태종의 허락으로 김춘추는 당나라의 유교 행사에 참관했다 얼핏 한가한 행보로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당에는 수많은 신라 유학생들이 있었다 김춘추는 이들을 만났다 유학생들에게 당의 정세를 듣고 분석하기 위한 의도였다
김춘추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초조해진 쪽은 오히려 당 태종이었다
그는 결국 김춘추를 다시 불렀다
"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 "
"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더군나 얼마 전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고 입조의 길을 막았으니 만약 흉악한 백제를 없애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 사로잡혀 바다건너 조공도 할 수 없을 것 이옵니다 "
당태종은 나당동맹을 수락했다
그렇다면 나당 동맹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나당동맹 결성으로 김춘추는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또한 그에게는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동지가 있었다 날개를 단 김춘추는 빠른속도로 신라사회를 개혁해 나갔다
그 증거가 경주의 용광동 고분에서 나왔다
김춘추는 나당동맹 성공 1년 뒤 당나라의 의관을 전격 수용했다 당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김춘추의 의도였던 것이다
김춘추가 신라의 실권을 쥐고 있는 동안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은채 죽었다 신라는 새로운 왕을 결정해야 했다 신라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 화백회의가 있었다 진골귀족들이 왕의 추대나 폐위 등 국가대사를 만장일치로 정하던 기구였다
후대왕을 정하는 화백회의가 열렸다 그 중심에 김유신이 있었다
마침내 김춘추는 신라의 왕이 되었다 (654년)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이 된 것이다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으나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를 침공했다 즉위 다음 해에는 백제와 고구려, 말갈 연합군이 침공해왔다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나당동맹을 성사시켰지만 당나라의 지원은 오지 않았다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던 그의 열망은 무산되는 듯 했다
낭보가 날아들었다 드디어 당의 소정방 13만 대군이 출정한 것이다
백제의 계백장군이 결사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영화 "황산벌" 참고 하시긔.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전쟁영화지만 허를 찌르는 대사가 많이 나오긔!)
마침내 660년 7월, 백제 의자왕이 항복했다
보름 후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사비성에 입성했다 김춘추는 소정방과 함께 높은 곳에 앉았다
김춘추의 복수는 철저했다 대야성에서 백제와 내통했던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던졌다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법민도 복수에 가세했다
그는 의자왕의 태자 융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묻어둔 적이 있다 그 일로 20년 동안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기쁨도 잠시 당의 야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는 소정방이 새긴 글귀가 남아 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것을 기념한다는 글귀다
그리고 백제에 5 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에 나섰다 심지어 당은 신라까지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은 의자왕과 함께 백성 만2천여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신라와 김춘추가 얻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 했다 백제는 멸망시켰지만 당은 신라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춘추는 죽음을 맞이했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지 1년 만 이었다
이러한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외교 지략가인가?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인가?
적지않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김춘추는 외교로서 역사를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자 비주류에서 왕위에까지 오른 풍운아 였다는것 이다
+ 오타나 맞춤법 지적 환영합니다 사진이나 음악이 제대로 안나오면 말씀 해주세요
+ 저는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진지해야 하지만 어려운 문자와 표현방식으로 어렵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오히려 역사 '공부'를 멀리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재밌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사진에 장난질을 좀 해봤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에 안드시면 다음 편 부터는 다시 그냥 캡쳐본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전 편 들은 각각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1부 "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769 세종대왕 2부 " 소리가 하늘이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822 광해군 "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973
+ 다음편은 " 일본 비불로 환생하다, 백제 성왕 " 편 입니다 원래 올리려고 했던 순서를 좀 바꿨습니다 (전 변덕이 불꽃같은 여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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