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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 2008.02.02 세종대왕 [ 제 2 부 소리가 하늘이다 ]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이 종묘에 제사를 올리는 종묘 제례
종묘 제례는 왕실에서 주관하던 행사로 국가적 행사였다
이 제례에 사용되는 음악이 바로 종묘 제례악이다 수많은 악기들이 빚어내는 음률이 제례를 더욱 장엄하게 해준다
이 종묘 제례악의 작곡가는 세종 세종은 이 종묘 제례악을 단 하루 밤 만에 작곡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
그는 왜 음악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그가 음악으로 추구한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
세종 실록에는 음악과 관련된 기사가 유난히 많다 그 중에는 특히 세종의 음악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적지 않다
새로 만든 악기 '편경'을 선보이는 날
소리를 듣고 있던 세종이 악기 곁으로 다가왔다 이 편경을 만든 실무책임자는 '박연' 이었다
" 이 소리 하나가 약간 높은데, 무엇 때문인가? "
세종이 지적한 편경에는 먹줄 하나가 남아있었다
" 편경을 잘라내기 위해 친 먹줄이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제대로 다 갈지 않아서 음이 높았습니다 "
세종은 먹줄 하나 두께가 내는 음의 차이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세종이 감지했던 먹줄 하나 두께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음의 높낮이를 알아보기 위해 주파수 측정을 했다
먹줄 하나 두께만큼 더 갈아냈다 더 얇아진 경석
음은 어떻게 변했을까
갈아낸 경석의 음은 약 10 센트정도 낮아졌다.
미세한 차이이다
세종은 반음의 10분의 1 음을 구분할 정도로 뛰어난 음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금 앞에서 시연을 했을 정도라면 편경은 특별한 악기였다는 것인데 세종은 왜 편경 제작에 이렇게 심혈을 기울였던 것일까?
많은 악기 중에서 편경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편경은 모든 악기의 기준 즉, 조율 악기인 것이다 편경은 돌로 되어 있어서 기후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음을 내주었다
악기는 우주의 소리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악기는 모두 자연재로를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나무 - 어, 축 흙으로 만든 질그릇 악기 - 부, 훈 대나무 - 금, 적
이런 악기로 우주의 소리를 담으려 했던 것이다 유교 음악에서 8음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음을 악기로 연주하면서 우주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였다
고려말-조선초기 어지러운 상황에서 악기를 구비해서 완전한 음악을 구비하려고 했다
세종의 이런 노력에는 음악 정비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조선은 유교 즉, 성리학을 국시로 세운 나라였다
성리대전은 성리학의 교과서와 같은 책 세종은 이 책을 전국에 보급 시켰다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려는 의도 였다
성리대전의 한 권인 율려신서
음악 이론서다
음악을 통치의 한 부분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에 보면 음악의 시작은 황종음에서 비롯된다고 되어있다
이 때 조선의 음악을 맡았던 인물이 '박연'
박연은 세종에게 조선의 음악을 정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무려 서른아홉편이나 올렸다
기준음인 황종음을 내는 기구가 황종율관 이었다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황종율관을 제작하게 했다
박연은 중국의 방식 그대로 황종율관 제작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세종은 박연의 실패 원인을 간파했다
" 우리나라가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춥고 더운 풍토와 기후가 중국과 현저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나무로 황종관을 만들려 하는가 우리나라는 중국과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황종관을 만드는 것은 옳지가 않다 "
조선 시대의 기준음은 어떤 음 이었을까
황종율관이 만들어지자 나머지 음들도 만들 수 있었다 황종음에서 3분의 1을 자른것을 임종음 이런식으로 3분의 1을 더하거나 줄이는 방법으로 12음을 모두 만들 수 있었다
황종율관은 단순히 음악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량형의 기준이 되었다
황종율관의 길이를 기준으로 황종척이 만들어지고, 이것을 기준으로 다양한 자가 만들어졌다
황종율관은 부피의 기준도 되었다 직경 12mm의 황종율관에는 기장알 1200개가 들어간다.
음악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한데서 출발했다 황종음을 찾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도량형을 통일했다
음악을 세우는 것, 그것은 국가의 표준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세종은 음악을 통해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고 했었고, 세종의 이런 노력을 받든 사람이 박연이었다
박연은 대금을 아주 잘 불었으며 음악적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태종때 이미 과거에 급제한 박연은 학문도 높았다 세종의 세자시절, 박연은 세종의 글 선생 이었다
세종은 세자시절 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현악기인 금을 아주 잘 연주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둘은 서로의 음악적 소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인연으로 세종은 박연에게 음악을 맡겼던 것이다
아악은 중국 황실의 음악 그러나 아악은 당 송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에서도 제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박연은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가 쓴 의례 통시학등의 문헌을 근거로 아악을 복원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중국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지금 세종실록에 악보로 남아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아악은 정비되었다 이로써 왕실의 위용과 법도가 선명해졌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종의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 우리나라는 멀리 동쪽에 있어 음악이 중국과 같지 않다 중국 사람들이야 그들의 제사야 평소 익숙하게 들었던 아악을 쓰는 것이 당연하겠다 허나 우리나라사람은 살아서는 우리나라 음악을 듣다가 죽어서는 아악을 듣게 되는 셈인데 제사 지낼 때 우리 조상님들이 평시 들으시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 "
세종의 뜻을 가장 잘 헤아렸다는 명재상 맹사성 그는 아악과 향악을 겸해서 쓰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우리음악인 향악을 쓸 것이냐 중국음악인 아악을 쓸 것이냐 갑론을박인 가운데 유일한 지지자였던 맹사성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음악에 관한 한 아무런 지지자가 없는 고독한 군주였다
박연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중국 음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세종의 의도를 반대했다 이에 세종은 자신이 직접 우리 음악을 작곡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아악을 정비한 이후 세종 13년 부터 27년 까지 우리 음악 창제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세종의 작곡 기사가 발견되었다
( '실제로 세종은 비밀리에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어느날 결과물을 대신들 앞에 내 놓아서 사관이 하루아침에 세종께서 지어냈다고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긔)
세종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음악에 담아 많은 사람과 우리 가락으로 즐기고 싶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이며 역사의 필연이라는 것을 천명한 노래다 세종은 이 용비어천가 가사에 직접 가락을 붙였다 그런데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
새로운 우리 글인 훈민정음의 창제 그리고 새로운 음악 작곡 여기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고 즐기게 하려는 세종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우리음악을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하고 싶었던 세종 세종은 우리 가락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악보까지 만들었다 우리 음악이 중국 음악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기록하는 방법도 달라야 했다
세종이 창안한 악보는 정간보 바둑판처럼 칸을 나누고 한 칸을 한 박으로 삼아 음 길이를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아악은 모든 가사의 음 길이가 똑같아서 길이를 표시할 필요가 없엇다 그러나 우리 노래는 가사 하나하나 마다 음 길이가 달라서 음 길이도 같이 표시해야 했다
세종이 남긴 여민락을 당시 그대로 복원해보기로 했다 음의 길이까지 적은 정확한 악보가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복원과 연주가 가능하다 세종 때 처럼 용비어천가 한문가사를 붙이고 악기 편성도 세종 때 그대로 했다
세종이 만든 당시의 여민락은 어떤 음악일까 여민락은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이다
세종은 정대업, 보태평 등을 만들때 우리 음악인 향악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널리 불리던 고려 속요에 가사를 바꿔 붙이고 음의 길이를 조절 하여 새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종 당대에는 새 음악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새 음악을 왕실의 여러 행사에 써야하는 데에 논의가 분분했다
" 새롭게 만든 신악이 조정의 공덕을 그려내는 일을 했으니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새롭게 만든 음악을 잘 들어보고 버릴것과 버리지 말 것을 보고하라 그러면 내가 마땅히 빼고 더하겠노라 "
세종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이 때 이미 세종은 깊은 병이 들어있었다 세종이 작곡 할 때 곁에서 도운 사람이 있었다
바로 수양대군
세종의 뜻은 수양대군이 세조가 된 이후에 실현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종묘 제례악이 지금까지 500년 넘게 원형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우리의 소리를 담은 세계문화유산이다
(+) 다음회 예고
+ 오타나 맞춤법 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음악이나 사진이 제대로 안나오면 말씀해주세요
+ 세종대왕 1 편은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769 을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 다음 편은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광해군 입니다
그리고, '백제를 멸하리라' 김춘추의 지독한 복수 고구려 여인 우씨 두 번 왕후가 되다 '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일본의 비불로 환생하다 백제 성왕
편이 차례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먼저 보길 원하는 편 있으시면 먼저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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