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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 2008.01.26 세종대왕 [ 제 1 부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
천문기록을 이용, 조선 초기의 기온을 알 수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양의 흑점 활동을 통해 당시의 기온과 태양 활동을 추정 할 수 있었다.
" 조선시대 초기는 태양 흑점 활동이 약했던 시대 이것은 지구에서 받는 일조량이 매우 낮음을 의미하고, 당시 농사 짓기에는 매우 안좋은 환경 "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세종시대. 그러나 기후나 자연 조건은 농사를 짓기에 열악한 시기였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수많은 가뭄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가뭄은 흉작으로 이어져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고, 농업은 황폐화 됐다.
이는 바로 나라 전체의 위기였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이끈 임금이 있었다. 조선 4대왕 세종대왕.
그는 과연 어떻게 조선의 농업을 발전시킨 민생 군주가 되었을까?
세종 당시의 개간 사업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인력을 동원 할 수 밖에 없는 개간 사업은 해안과 섬을 중심으로 전 국토적으로 시행되었다. 경작지 확대를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다면 세종이 이렇게 개간 사업을 펼친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세종시대는 가뭄의 연속이었다. 세종 즉위 이후 10년간 단 한 해도 가뭄이 들지 않은 해가 없었다. 가뭄과 흉작은 그대로 백성의 고통이 되었다. 흙을 파먹는 백성이 생겨날 정도였다.
농업이 국가 경제 기반이던 시대. 연이은 흉년은 그대로 국가적 위기였다. 개간으로 경작지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불안정한 기후로 인한 농업의 황폐화는 젊은 임금 세종에게 큰 고통이었다.
세종의 고민은 깊어갔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무려 열 하루 동안이나 앉은채 밤을 지새기도 했다.
대신들에게는 가장 먼저 날씨와 농사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농업을 일으키고 민생을 구제하는 것. 그것이 조선 4대왕 세종에게 놓인 절체절명의 과업 이었다.
농지를 늘리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것, 가장 시급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된다 그것은 바로 "과학 영농"
주먹구구식 농업이 아닌 과학 농법을 통해서 조선의 기술을 한 단계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조선은 자격루로 표준 시계를 가지게 되었고, 시간 개념이 보편화 되었다. 24절기에 맞춰 농사를 짓는 일. 즉 우리에게 맞는 농시를 정비하는 일 또한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농시를 우리 농사에 적용 - 그 편차가 적지 않았다. 세종은 그를 바로 잡고자 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위해서는 천문관측이 필수적이었고. 이를 위해서 혼천의 등이 제작 되었다.
일 년 동안의 절기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혼상도 세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 이 모두가 우리 농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실정에 맞는 정확한 농시를 위해 세종은 많은 과학기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강우량 측정이 필수적이었다. 측우기는 문종이 세자시절 구리로 만들었다. 이로써 지역별 정확한 강우량 통계와 분포를 알 수 있었고, 농사에 적용 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 역시 과학영농을 위한 세종의 열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과학 농법에 대한 관심은 벼 수확의 증대로 이어졌다.
직파제배를 하던 벼농사에 모를 옮겨심는 이앙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앙법은 김매기 횟수가 줄어들이 노동력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그러나 세종 당시는 관개시설의 미비로 본격직인 시행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이앙법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종 후대 토지 1결당 생산량은 1200두까지 높아졌다.
이처럼 세종은 과학영농으로 농업생산성을 증대하고 민생해결과 국가의 경제력을 높이려했다. 백성을 살리는 좋은 정치는 과학에 의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세종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은 과제가 있었다. (과제 크리..) 한반도는 남 북으로 긴 땅. 따라서 각 지역에 따라 농법과 소출양이 달랐다.
이에 세종은 전 국토의 생산량을 골고루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여, 각 지역의 여건에 맞는 통일되고 합리적인 농법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로써 세종의 또 하나의 역작이 만들어지게 된다.
OH OH 농사직설 OH OH
그것은 바로 농사직설.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로 이 후 저술되는 농서들의 근간이 되는 책이다. 농사직설은 모두 10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는데, 땅을 가는 법, 모판 만드는 법, 종자 선택과 보관법, 비료 만드는 법 등 거의 모든 농법을 총 망라하고 있다.
농사직설과 관련 세종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농사직설이 보급된지 8년 째, 경기도에서 한 줄기에서 4개의 이삭이 열리는 새로운 보리 품종이 나타났다. 이에 경기 감사는 세종의 은덕이라고 했다.
그러자 세종은 이를 과장하지도 말고, 잔치도 여는 행위도 못하게 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농사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농사직설에 나오는 내용은 얼마나 과학적일까. 농사 직설에는 비료 만드는 법도 나와있다.
지금도 재와 가축 배설물을 섞은 두엄은 땅심을 높이는데 사용되고있다. 농사직설에 나오는 시비법 그대로 이다.
지금도 유용하고 과학적인 농법을 담고 있는 농사직설.
세종은 농사직설을 편찬할 때, 각 지역의 경험많은 농부들에게 직접 묻도록 했다.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세종의 노력은 결실을 이루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토지결수를 갖게 된 것이다. 토지 결 수가 높다는 것은 생산량수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대규모의 개간사업과 과학영농, 검증된 농법으로 국가 경제를 일으키려고 했던 세종.
국내 농업기반을 다져가는 세종에게 또 다른 과제가 생겼다. (과제 계속 나와.......)
세종 전반기만 해도 청천강 이북은 조선의 땅이 아닌 여진족과 공동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행정, 군사 기지를 만들었지만 백성들이 살지 않기때문에 여진족이 넘어와 살게 되고, 또한 몽골족으로 인해 계속해서 여진족이 남쪽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파저강은 압록강의 지류로 지금의 중국 요녕성의 지류를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이 파저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들이 수시로 건너와 함경도 땅을 침범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조정의 많은 신료들은 이 지역을 포기하자고 했다. (심지어 황희 까지도)
" 영토를 자꾸 넓히면서 오랑캐들과 충돌하느니 차라리 깊숙하게 후퇴해서 여진족을 내버려두고, 백성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군대 근무를 줄여주는 편이 좋을 듯 하옵니다 "
그러나 세종의 생각은 달랐다. 최윤덕에게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최윤덕은 토벌대 규모에 대한 의견을 올렸다 압록강 이북 곳곳에 퍼져있는 여진족을 일거에 토벌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 만약 조선군이 토벌에 나서면 이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함께 대항을 할 것 이므로 최소한 1만의 군사가 필요합니다 "
이에 세종은 최윤덕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세종은 직접 작전을 지시했다.
단 열흘 만의 이 공격으로 조선군 파저강 유역 여진족을 완전히 진압 하였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이렇게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벌을 감행 했을까?
두만강 건너와 파저강 일대는 넓은 영토와 토지가 비옥했기 때문에, 좋은 땅에 대한 확보와 안정된 농사에 대한 여지를 만들고자 했다.
토벌 후 세종은 농사 뿐만 아니라 국방과 행정체제까지 구축하게 된다.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4군 6진을 설치.
그러나 여전히 남은 과제는 높아진 생산성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것 이었다. 그 핵심에는 세금제도가 있었다.
아무리 생산성이 높아져도 조세 제도가 합리적이지 못하면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은 세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한 세제 개편을 추구했는데, 이를 위해 세종은 무려 17년에 이르는 의사 결정과정을 거친다.
세종 25년. 어전에서는 새로운 조세제도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 다시 의논 하라"
논란의 핵심은 세금제도 였다. 그때 까지는 일률적으로 수확량의 10분의 2를 세금으로 거두는 과전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전법은 적지 않은 문제를 드러냈다.
합리적인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 과정에서 아전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없앨 수 있는 세금제도. 동시에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그들이 납득 할 수 있는 세금제도를 세종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민은 즉위 초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세종은 과거 시험의 마지막 과정인 책론에 공법을 문제로 출제하기도 한다. 그만큼 세종에게 세제 개편은 절실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제, 공법을 위한 세종의 구상은 치밀했다.
" 공법의 시행을 논의하고도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 만약 이 공법을 세운다면 반드시 백성들에게 후하게 될 것이고 나랏일도 간략하게 될 것이니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여라. "
세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여론. (보고 있냐.. 이명X)
중앙과 지방의 관리부터 빈민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의 여론을 골고루 듣게 했다. 나아가 관리들이 직접 백성들을 방문하여 직접 백성들의 의견을 듣게했다. 여론의 왜곡을 막기위한 조치였다.
첫 여론 조사를 지시한지 8개월. 호조에서 중간보고를 올렸다.
세종은 여론을 받아들였다. 다시 공법을 의논하게 되었다.
" 백성이 좋아하지 않으면 이를 시행 할 수 없다. 공법의 편의 여부와 납사의 폐해를 구제하는 일들을 백관으로 하여금 숙의토록 하라 "
세종이 다시 지시를 내린지 한 달 후
논란은 계속되었다. 지역별 소출 차이를 감안하여 최선의 세액을 매기는 것이 마지막 과제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공법을 보완 하는데 6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1436년 마침내, 공법절목을 마련 부분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세종의 현지답사도 있었으며, 백성들의 반대시위도 있었다.
무려 17년의 세월이었다. 첫 구상부터 실시까지 이 긴 시간동안 공법을 위해 여론을 묻고 제도를 보완했던 것이었다.
" 15 세기 초에 관련된 각 계층의 의견을 물었다는 것은 세계 역사상 없는 것. 세종은 절대로 새로운 제도를 할 때 급조하지 않고 실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겠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왕정을 펼친 왕. 실제 경복궁 안에서 농사를 지어본 것이 가장 표본적인 예. 유교 정치 사상 속에서도 세종과 같은 리더십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큰 자랑거리."
공법시행으로 백성들의 조세부담은 현저히 가벼워 질 수 있었고, 국고도 쌓여깠다. 국가 비축곡식은 최고 500만석에 이르렀다. 이는 중종 때 200만 석, 선조 때 50만 석(....) 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과학 영농으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합리적인 조세제도로 개혁을 단행한 세종.
이로써 "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 라는 그의 철학은 완성 되었다.
(+) 2부 예고
+ 열심히 보면서 캡쳐하고, 받아썼긔. 방송사 로고도 다 가리긴 했는데 올려도 되는건지 모르겠긔 ㅎㅎ 문제시 알려주세요! 오타 지적도 환영합니다.
사실 2부랑 다음 편인 광해군 편까지 하려고 했는데 한 편 하는데 시간 엄~청 걸리네요 ㅠ 길~게 정성스럽게 길 쓰시는 소드 님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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