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시 댓글로 달아주세요
한국사전 2008.07.26 [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둔 채 였다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했다
노국공주의 초상과 평상시 처럼 지냈던 공민왕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
즉,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 또, 아팠다
열녀와 간신까지 포함한 천여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 중 공민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치 못했다
그녀는 몽골사람 이었다
공주가 유독 그리웠던 10월
-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다시 1372년 10월 1일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결국 정신병이 생긴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기록 속에 스며들어 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고려가 처했던 비극적 현실 속에 그 답이 있다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고작 12살
고려 왕의 귀양 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양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의 왕 충혜를 발로 차며 포박했고 또한 꾸짖기까지 했다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으로 가야 했다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자 공민왕의 개인적인 원한이기도 했다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원은 고려의 왕과 원의 공주를 혼인 시켰고 그 아들은 북경에 데려다 인질로 삼았다
다섯명의 고려왕은 모두 일곱명의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 심지어 쿠빌라이칸에게 장가 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였다
이런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 결혼을 올린다
이유는 무엇일까?
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길에 사망하며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보위에 오른다
그 후에도 충혜왕의 서자 저하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된다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 이었다 공민왕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두번째 왕위를 빼앗긴지 불과 5개월 뒤 노국공주와 서둘러 혼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여인 노국공주의 결혼은 분명히 정략결혼이었다
-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 한 점이 보관되어있다 원래는 두루마기 형태였으나 일부만 남아있다
수렵도라고도 불리는 천산대렵도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광경이 정교한 필치와 깊이있는 색조로 묘사 되어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 실력은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쌍화곡 고려속요 맞긔.. )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공민왕은 고려란 나라에서 사냥을하지 않는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타지 못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 코드가 일치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59년 4월의 기록에 나타나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청을 하고 있었다
이 때가 결혼 11년 차 혼인 한 지 10년이 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후궁 많은 왕들 보고 있숴여????!!! 일단 세종대왕님 눈 좀 감으시고...)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대신들의 청은 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돈독해졌다
20만명의 홍건적이 무서운 속도로 남진해 20여일 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갔을 때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피난을 떠났다
길은 험했다 왕의 옷은 젖고 얼었다 공민왕은 옷 섶으로 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
시련의 시기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피난처인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해 말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천생의 베필이었다
2년 뒤 흥왕사
괴한 50여명이 공민왕의 처소에 침입했다 반역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그녀가 나섰다
"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 "
반란군은 원나라 공주의 기세에 역모를 포기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7세기가 지나도록 이어졌다
서울 마포의 광흥창터에는 공민왕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엔 그 홀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다 노국공주도 함께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노국공주와의 사랑을 배경으로 공민왕은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반원의 깃을 내건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은밀한 계획이 드디어 드러났다 그것은 친원 세력의 처단이었다
기철과 그의 아들 유걸, 조카와 측근까지 기씨 일당은 대부분 이 밤, 그자리에서 즉사했다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기철 일당의 처단 그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철은 바로 원나라 기황후의 친오빠 였기 때문이다 누이가 황후에 조카가 황태자 기철은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지도 않았다
오만함은 도를 넘었다 친원파는 고려를 원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원나라에 기댄 권문세족들은 아녀자를 범하고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팔고, 각지에 농장을 만들어서 수탈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자신의 딸들을 원나라에 기꺼이 조공했다
공민왕은 계엄령을 선언한 뒤, 이것이 공정한 처사였음을 원에 알렸다
공민왕이 친원세력들을 제거할 당시 원나라는 각종 농민반란으로 흔들리는 말기였다
고려에 정벌군을 보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
공민왕은 이 정세를 노렸다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 국가 고려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민왕의 꿈은 즉위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했다
10년만에 귀국한 공민왕은 먼저 100여년간 이어지던 풍습부터 바로잡았다
스스로 먼저 변발을풀고 몽골복을 벗었다
풍습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전통 혼례에도 몽골의 풍습이 스며들어 남아있다
신부의 족두리나 연지 곤지가 그렇다 풍속은 섞이면 정착하기 마련이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고려에 설치된 원나라 관아 정동행성 또한 폐지시켰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에겐 더 큰 포부가 있었다
쌍성총관부를 격파하고 잃어버렸던 북방영토를 수복한 것이다
북벌에 대한 공민왕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까지 수복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각오는 마침내 요동을 (잠시)점령하게 된다
공민왕의 목표는 한가지였다 자주독립국가 고려
노국공주에겐 자신이 자란 모국을 배반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재위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의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노국공주와의 사랑과 거침없는 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은 거기까지 였다 공민왕의 말로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365년 2월
16년 만의 첫 임신 공주가 위독했다
산달이 되며 병이 위독해지자 공민왕은 일급 죄인까지 사면하며 무탈을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죽었다
-
노국공주의 정릉 그리고 그 곁에는 공민왕의 현릉도 있다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릉이다 노국공주의 능을 만드며 공민왕은 쌍릉을 계획했다 공주의 능을 지으며 또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시켰다
3천명의 승려가 지낼 수 있는 영정 즉, 공주의 초상화를 걸어둘 전각을 짓기 위해서였다 (영정 걸어두려고 3천명 들어가는 전각 짓는 스케일의 사랑 ㄷㄷㄷ)
공주가 죽은지 8년 뒤
" 어찌하여 귀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소? "
" 공주만 한 여자가 없습니다 "
" 한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왕도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할텐데 어찌 그다지 심히 슬퍼하시오 남들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봤다 신돈을 통해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그는 곧 타락했다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백관들은 궁궐로 가지 않고 그의 집으로 출근했다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주살한다
공민왕이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신돈의 사망직후 그는 자제위를 설치한다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 집단이었다
(영화 "쌍화점" 다들 보셨나요? 영화에서는 자제위가 아닌 '건룡위' 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다들 기억나시나요? ㅎㅎ 비록 영화는 후로게이 정치 치정극이 되고 우리에게 '자시에 오겠다' 만 남겼지만..ㅠㅠ)
공민왕은 자제위를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은 왕비조차도 가까이 하지않았다 이 무렵부터 고려사는 공민왕을 정신이상으로 보고있다
공민왕은 극도로 문란해져갔다 자제위 소년들의 밤을 훔쳐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이한 왕의 행적
아내들을 멀리하고, 여장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총애한 자제위까지 고려사의 기록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렇게 2년
공민왕은 자제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3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고 그리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9년
마흔 다섯 왕의 죽음은 허무했다
공민왕은 생전의 바람대로 노국공주의 곁에 잠들었다 고려의 왕릉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평가받는 공민왕릉의 내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특별한 구조로 건축되어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곧잘 회자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지극한 사랑을 비유한다
조선의 정수를 관통하는 종묘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 공민왕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의 곁에는 노국공주가 있다
공민왕을 모시기 위해선 노국공주도 함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공민왕의 마지막 모습이 이처럼 기이한 것은 고려사가 조선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도 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려와 공민왕의 말로는 어둡게 쓰여져야만 했다
하지만 노국공주와의 사랑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했던 것이다
650 여 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전해지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역사의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이었다
+ 오타나 맞춤법 지적 환영합니다 사진이나 음악이 제대로 안나오면 말씀 해주세요
+ 전 편 들은 각각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1부 "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769 세종대왕 2부 " 소리가 하늘이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822 광해군 "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1973 고구려 여인 우씨 " 두번 왕후가 되다 "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302777
+ 다음 편은 " 고려여걸 천추태후 " 편 입니다
+ 원래는 쉽게 보셨으면 해서 역사순, 시간순 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사정상 시대가 좀 섞이게 될거 같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그리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 (하나도 빠짐 없이 다 보고 있어요!)
|